동지가 지나고
동지가 지나고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4.12.29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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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한 해 중 해가 가장 짧은 날이 동지(冬至)이다. 차츰 짧아지기만 하던 해는 이날을 기점으로 짧아짐을 멈추고, 서서히 길어지는 단계로 접어든다.

따지고 보면, 세상 모든 일들에는 동지(冬至)와 같은 변곡점이 반드시 내재되어 있다. 짧아지면 어느 날을 기점으로 해서는 반드시 길어지고, 낮아지면 어느 날에는 반드시 높아지게 되어 있는 것이 세상 이치이다. 그러나 하나 예외가 있으니, 인생이 그것이다. 인생은 흘러가기만 할 뿐, 돌아오는 변곡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동지(冬至)가 지난뒤에 느끼는 쓸쓸함이 더욱 커지는 것 같다. 당(唐)의 시인 두보(杜甫)가 그러하였다.

동지 후에(至後)

冬至至後日初長(동지지후일초장):동지가 후에 해가 처음으로 길어지니
遠在劍南思洛陽(원재검남사낙양):멀리 검남에 와 낙양을 생각하노라.
靑袍白馬有何意(청포백마유하의):안녹산과 사사명은 무슨 뜻으로 일으켰는가.
金谷銅駝非故鄕(금곡동타비고향):금곡과 동타가 고향이 아니었기 때문이로세
梅花欲開不自覺(매화욕개부자각):매화꽃 피려하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棣萼一別永相望(체악일별영상망):형제를 한번 이별에 영원히 서로 바라만본다.
愁極本憑詩遣興(수극본빙시견흥):근심이 많아 시에 의탁하여 흥을 풀어
詩成吟咏轉淒涼(시성음영전처량):시가 지어져 읊으니 더욱 쓸쓸하고 슬퍼진다.

때는 동지(冬至)가 막 지난 다음 날이다. 요즘 달력으로 치면, 12월 23일인 셈이다. 이 날은 짧아지기만 하던 해가 처음으로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로 의미가 있다. 이제는 봄이 머지않아 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 봄 직하다.

그러나 시인에겐 봄이 오리라는 희망을 무색케 하는 쓸쓸한 기분이 찾아들고 있었다.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시점에 먼 타지인 검남(劍南) 땅을 떠돌던 차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쓸쓸한 기분에 휩싸인 시인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자신이 오랜 세월을 의탁하고 살았던 낙양(陽)이었다. 푸른 도포를 걸쳤던 안록산(安錄山)과 흰 말을 탔던 사사명(史思明)이 난()을 일으키지만 않았어도 시인이 이렇게 먼 객지를 떠도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도대체 이들은 왜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권력욕과 영웅심에서 벌인 일이란 것을 모를 리 없지만 시인은 짐짓 딴청을 부린다. 낙양(陽)의 번화가(繁華街)인 금곡(金谷), 동타(銅駝) 거리가 고향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아름다움을 몰랐기 때문에 그 난리를 부린 게 아니었냐는 것이다.

시인의 쓸쓸한 기분에 대한 원망은 애먼 꽃에게로 옮아간다. 곧 필 것을 스스로는 알지 못하는 매화, 한데 어우러져 있다가 한 번 헤어지면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산앵두꽃, 이 꽃들 때문에 시인은 쓸쓸했던 것이다. 이래도 근심이고, 저래도 근심이고, 마침내 시인은 자신의 일인 시 짓기를 하기로 한다.

시에 감흥을 다 풀어놓았으니, 쓸쓸함도 사라졌겠거니 했는데, 완성된 시를 소리내어 읊조리노라니, 그속에 들어갔던 쓸쓸함이 도로 밖으로 나와 시인을 처량하게 만들고 만다. 동지 후의 쓸쓸한 기분을 시로 풀어가는 시인의 재치가 돋보인다.

동지가 지나면 해는 날로 길어진다.

봄이 멀지 않았다는 희망에 들뜨기도 하지만, 나이 들고 객지를 떠도는 신세인 사람들은 쓸쓸한 기분이 들기가 쉽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쓸쓸함도 예외가 아니다. 쓸쓸함에 재치를 입히면, 쓸쓸함도 멋진 풍류로 바뀌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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