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쌓인 겨울 저녁
눈 쌓인 겨울 저녁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4.12.08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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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겨울은 한해의 끝자락이다. 그래서 그런지 인생의 황혼기를 맞은 사람들은 겨울이 되면 늙은 나이가 부쩍 의식이 된다. 나이 한살의 무게가 실감이 나는 계절이 겨울인 것이다. 한 해가 넘어가는 겨울, 여기에 하루해가 넘어가는 저녁이면 나이 든 사람들은 옛 추억이 떠올라 감상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당(唐)의 시인 왕유(王維)는 겨울 저녁에 눈이 쌓인 모습을 보고 언젠가 가 보았던 친구의 집이 아련히 떠올랐다.

◈ 겨울 저녁 눈을 보며 호거사의 집을 생각하다(冬晩對雪憶胡居士家)

寒更傳曉箭(한경전효전) : 차가운 저녁북소리 새벽으로 전해 가는데

淸鏡覽衰顔(청경람쇠안) : 맑은 거울에 초췌한 얼굴 비춰본다.

隔牖風驚竹(격유풍경죽) : 창 밖에는 바람 불어 대나무 놀라고

開門雪滿山(개문설만산) : 문을 여니 눈이 산에 가득하구나.

灑空深巷靜(쇄공심항정) : 눈발 공중에 날리니 골목이 조용하고

積素廣庭閒(적소광정한) : 쌓인 흰 눈에 넓은 뜰이 한가하다.

借問袁安舍(차문원안사) : 묻노니, 한나라 선비 원안의 집안에

翛然尙閉關(소연상폐관) : 태연자약하게 아직도 문 닫고 있을까.

※ 겨울밤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는데 저 소리는 아마도 새벽을 알리는 물시계의 바늘에도 전해질 것이다. 그런데 이때 문득 시인이 찾은 것은 집 안 어느 한 쪽에 걸려 있는 거울이었다. 아마도 한 해가 저물어가는 겨울날 저녁이라는 시간에 촉발을 받은 때문인지 자신의 많은 나이가 의식이 되었던 것이다. 누가 닦아 놓았는지 거울은 유난히 맑았고 그래서 노쇠한 얼굴 모습이 더욱 뚜렷하게 보였다. 거울에서 자신의 나이를 확인한 시인은 착잡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신경을 집 밖으로 옮겨간다. 귀가 먼저 밖을 향했다. 들창 너머로 바람에 놀란 대나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밖이 궁금해진 시인은 이제 눈을 밖으로 돌렸다. 문을 열어 보니 눈이 가득 쌓인 산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더이상 방에 가만히 앉아 있기가 힘들었던지 시인은 아예 밖으로 나왔다. 동네 고샅으로 눈이 뿌려지고 있었고 깊은 골목은 사람의 왕래가 끊기어 고요하였다. 하얀 빛이 소복이 쌓인 넓은 마당은 번다한 일 하나 없이 한가하기만 하다. 먼 산이고 동네 고샅이고 마당이고 할 것 없이 온통 눈인 것을 보자 시인은 문득 호거사(胡居士)라는 한 친구가 생각났다. 

먹을 것이 다 떨어지도록 몇날 며칠이고 눈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으면 보통 사람들 같으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집 밖으로 나오게 되어 있다. 그러나 후한(後漢)의 엄격한 관리였던 원안(袁安)은 눈이 아무리 오랫동안 내려도 꿈쩍 않고 집 안에 꼼짝도 않고 태연하게 누워 있었다고 하는데 시인의 친구가 영락없이 그러하였다. 시인은 폭설에도 태연자약(泰然自若)함을 잃지 않은 친구를 닮고 싶었던 것이리라.

한 해가 저물어 갈 무렵이면 나이 든 사람들은 부쩍 자신의 나이가 의식이 된다. 거울에 비친 노쇠한 모습은 스스로에게도 낯설기만하다. 이럴 때 사람들은 의기소침해지기 쉽지만 따지고 보면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도리어 겨울의 정취를 즐기며 태연자약한 마음으로 삶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면 저무는 겨울과 저무는 저녁이 결코 나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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