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골짜기
가을 골짜기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4.10.20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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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맑고 서늘한 가을날은 걷기에 더없이 좋다. 이곳저곳을 한가롭게 다니면서 가을의 이모저모를 눈여겨 들여보다 보면 평소에 느끼지 못하던 가을 정취가 새롭게 몸에 와 닿기도 한다. 하늘과 산, 물처럼 크고 일반적인 풍광에서도 가을을 느낄 수 있지만 나뭇잎이나 돌, 새와 같은 작은 정경들 속에도 빠짐없이 가을은 자기 자리를 잡고 있다. 당(唐)의 시인 유종원(柳宗元)은 어느 가을날 한가롭게 홀로 걸으며 가을 정취를 꼼꼼하게 더듬고 있었다.

◈ 남쪽 골짜기에서 짓다(南磵中題)

秋氣集南磵(추기집남간) : 가을 기운 남쪽 골짜기에 모여들고
獨遊享午時(독유향오시) : 혼자 거닐며 한낮 시간을 즐기노라
廻風一蕭瑟(회풍일소슬) : 회오리 바람이 한번 소슬하게 불고
林景久參差(임영구참치) : 숲 그림자는 언제나 들쭉날쭉 하네
始至若有得(시지약유득) : 막 와서 보니 마음에 들었지만
秒深遂忘疲(초심수망피) : 조금 깊이 들어가니 마침내 피로가 잊혀지네
羈禽響幽谷(기금향유곡) : 집 잃은 새의 울음 골짜기 울리고
寒藻舞淪漪(한조무윤의) : 차가운 마름은 물결에 춤추듯 나부낀다.
去國魂已遠(거국혼이원) : 고향 떠나있어 고향생각 아득해지고
懷人淚空垂(회인루공수) : 친구들 생각하니 눈물이 쏟아진다.
孤生易爲感(고생이위감) : 외로운 인생이라 감상에 쉽게 젖고
失路少所宜(실로소소의) : 벼슬길 잃어 마땅히 있을 곳이 없었네
索莫竟何事(삭막경하사) : 실망스러워 끝내 무슨 일을 해야 할 지 모르겠고
徘徊祇自知(배회기자지) : 배회하며 단지 마음을 달래어 볼 뿐이네
誰爲後來者(수위후래자) : 누가 뒤에 이곳에 와
當與此心期(당여차심기) : 더불어 이 마음 알아줄까나

※ 어느 가을 맑은 날, 가을 소풍에 나선 시인이 이른 곳은 남쪽 골짜기였다. 그곳에 오기까지 시인은 기대와는 달리 날씨 외에 별다른 가을 정취를 느끼지 못했는데 그 이유를 남쪽 골짜기에 도착하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보이지 않던 가을 분위기가 모두 그곳에 집합해 있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시인은 안도감을 느끼고 정오의 가을 정취를 만끽하기에 이르렀다. 쌀쌀한 소슬바람도, 부쩍 길어진 그림자도 그곳에 있었다. 이러한 가을 정취는 시인을 흡족하게 했고 먼 길의 피로마저 잊도록 만들었다. 

깊은 계곡에 울려퍼지는 집 떠난 철새의 울음과 잔물결에서 추는 가을 마름의 춤은 가을 정취를 더욱 물씬하게 하는 풍광들이다. 가을 정취에 빠져있던 시인은 문득 지난 일들을 떠올렸다. 고향이 생각나고 친구가 그리워졌다. 외로웠던 삶과 순탄치 않았던 벼슬길이 떠오르기도 했다. 시인은 자신의 쓸쓸한 처지가 실망스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다만 여기저기를 배회하며 스스로를 달랠 뿐이다.

가을 산골짜기에는 이런저런 가을의 정취가 한 데 모여져 있다. 천천히 한가롭게 걸으면서 들여다보면 가을의 세밀한 속살들까지도 볼 수 있게 된다. 더불어 지나온 일들을 떠올리며 감상에 빠지기도 하고 쓸쓸함에 젖기도 해보라. 이것이 바로 가을이 주는 카타르시스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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