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국화
가을 국화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4.10.06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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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가을 하면 떠오르는 꽃은 뭐니뭐니해도 국화이다. 색깔과 모양에 따라 종류가 다양하기도 하지만, 어느 것이든 가을 느낌을 풍기기는 매한가지이다. 집안에서 정성들여 기른 국화는 고고한 선비의 기품을 지니고 있고, 산야를 덮고 있는 들국화는 청초하면서도 강인하다. 이러한 국화를 보게 되면, 사람들은 가을 정취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당(唐)의 시인 백거이(白居易)도 예외가 아니었다.

◈ 몽득과 술 사 마시고 후일을 기약하며(與夢得沽酒閑飮且約後期)

少時猶不憂生計(소시유불우생계) : 젊어서도 생계에 마음 두지 않았거늘
後誰能惜酒錢(노후수능석주전) : 늙고 난 뒤 누가 술값을 아낄 수 있을까
共把十千沽一斗(공파십천고일두) : 일만 전을 모두 들여 술 한 말 사는데
相看七十缺三年(상간칠십결삼년) : 돌아보면 우리 나이 일흔에 세살 모자라네
閑微雅令窮經史(한미아령궁경사) : 한가로이 경전과 역사책 뒤져서
醉聽淸吟勝管絃(취청청음승관현) : 취하여 듣는 그대 노래 관현악보다 좋구나
待菊黃家醞熟(갱대국황가온숙) : 또 국화꽃 노래지고 빚은 술 익을 때 기다렸다
共君一醉一陶然(공군일취일도연) : 그대와 술 마시고 거나하게 취하여 보세나

※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시인은 자신의 지난 삶을 반추하며 상념에 젖는다. 돌이켜 보면 젊었을 때도 도리어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리지 않았다. 살 궁리를 도모하고 재산을 모으고 하는 이런 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기질의 시인이 나이가 들었다 해서 바뀔 리가 없다. 여전히 술 마시는 데에 돈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술 한 말을 사기 위해서 만 냥이나 되는 거금을 서슴지 않고 써버리는 호기(豪氣)는 시인 이전에 이미 유래가 있었다. 이는 당(唐)의 선배 시인인 이백(李白)이 <將進酒>에서 이미 읊었듯이, 먼 옛날 위(魏)의 시인이자, 조조(曹操)의 아들이었던 조식(曹植)이 이미 보여주었던 호기(豪氣) 그대로이다. 

시인은 젊을 적부터 이러한 성정(性情)을 지녀 왔지만, 나이 70을 3년밖에 남겨놓지 않은 상황에서도 여전히 그 불꽃이 꺼지지 않았다. 술을 거의 무한정으로 통음(痛飮)하고 돈을 아끼지 않는 것은, 명리(名利)를 좇는 세속적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행위이다.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읽고, 음악 연주 없는, 맑은 읊조림을 듣는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탈속(脫俗)의 행위를 최종적으로 장식하는 일은 아무래도 가을의 꽃인 국화(菊花) 몫이다. 시인은 벗과 헤어지면서 국화가 노랗게 피고 빚은 술이 익을 때 다시 만나 흠뻑 취해보자고 기약하는데, 왜 하필 국화 필 때이겠는가? 동진(東晋)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이 국화를 감상하며 유유자적한 이래로 국화는 은자(隱者)의 꽃으로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욕심이 사나워지고, 삶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기 쉬운데, 이런 때일수록 마음가짐을 더욱 여유롭게 할 필요가 있다. 친구와 통음하면서 돈을 아낌없이 쓸 수 있는 노년은 얼마나 황홀한가? 경서나 사서를 읽으며 선인들의 삶의 궤적을 좇다보면, 마음은 절로 평온해진다. 여기에 국화꽃을 감상하면서, 잘 익은 술을 가까운 친구와 나누어 마시고 도도하게 취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또 바랄 게 무엇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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