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그치고
장마가 그치고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4.07.21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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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여름은 비의 계절이지만, 비가 반가운 것만은 아니다. 거세게 오래도록 그치지 않고 내리는 비는 사람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재앙이기도 하다. 이른바 장마인 것이다. 장마는 사람들에게 지루함이라는 정서상의 고통과 축축하고 먹을 것을 없게 만드는 생활상의 고통을 함께 가져다준다. 장마를 수반한 여름에 가장 반가운 소식은 장마가 지나갔다는 것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장마는 반갑진 않지만, 반가움을 가져다 주는 존재이다. 조선(朝鮮)의 시인 김성일(金誠一)은 장마가 지나고 난 뒤 산속의 산장(山莊)을 찾았다가, 장마 뒤의 감회를 읊어내고 있다.

 

◈ 비가 내린 뒤에 산장에서 노닐며(雨後遊山莊)

久雨見天日(구우견천일) : 긴 장마 끝에 하늘에 해 보이자

曳杖投山園(예장투산원) : 지팡이 짚고 산장에 든다.

溪雲尙含滋(계운상함자) : 골짝 구름은 아직도 촉촉한데

露葉風飜飜(노엽풍번번) : 이슬 젖은 나뭇잎 바람에 날린다.

靑山忽入望(청산홀입망) : 청산에 홀연히 들어가 먼 곳을 내다보니

妙意終難言(묘의종난언) : 오묘한 뜻 끝내 말로 하기 어려워라.

惜無同聲子(석무동성자) : 함께 노래할 사람이 없어 애석하고

獨往傷吟魂(독왕상음혼) : 홀로 가서 시 읊던 영혼을 마음 아파하네

日暮還空廬(일모환공려) : 날 저물어 빈집에 돌아오니

新月滿柴門(신월만시문) : 초승달 빛만이 사립문에 가득하다.

 

※ 장마철에 가장 구경하기 어려운 게 해일 것이다. 몇 날 며칠이고 까만 비구름에 가려 해는 좀처럼 그 모습을 드러낼 기회가 없다. 한여름 땡볕은 호랑이보다 무서운 존재이지만, 오래도록 보이지 않다가 나타나면, 또 이보다 더 반가운 일이 없을 것이다. 긴 장마에 어쩔 수 없이 집안에 갇혀 있던 시인은 하늘에 해가 보이자 반갑기 이를 데 없었다.

시인은 더 이상 집에 머물 수 없다. 장마 때문에 가지 못하고 있던 산장(山莊)에 가기 위해 지팡이를 잡고 나섰다. 계곡의 구름은 여전히 물기를 잔뜩 품고 있었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위에는 이슬이 듬뿍 배 있었다. 비 그친 지가 얼마 안 된 것이다. 장마 때문에 오지 못하다가, 일단 길을 나서니, 푸른 산속에 들어 먼 곳을 바라보는 것이 갑작스럽게 느껴졌다. 장마가 그치고 난 뒤 갑작스레 보게 된 산의 모습에는 기묘한 뜻이 담겨 있었지만, 그것을 말로 표현할 방법은 없었다. 이치는 표명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감흥까지 속으로만 삭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노래를 부르려는데, 막상 같이 노래할 벗이 없음을 깨닫고는 애석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홀로 여기저기 다니며, 산의 감흥을 노래하는 대신 시를 읊던 영혼을 애상해했다. 그러다가 뉘엿뉘엿 해가 넘어가서야 빈집으로 돌아왔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집이었지만, 뜻밖에도 반가운 손님이 와 있었으니 사립문에 가득 내린 초승달 빛이 그것이었다. 감각적이면서도 따뜻한 시인의 시선이 느껴진다.

장마는 지루하지만, 장마가 그친 뒤의 세상 모습은 정겹고 따뜻하게 마련이다. 무섭던 땡볕도 반갑고, 비 때문에 찾지 못했던 산속도 너무 정겹다. 여기에 텅 빈 집 사립문에 내린 달빛은 장마 뒤에 만나는 호사가 아니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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