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류 꽃과 여름
석류 꽃과 여름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4.06.16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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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여름의 주인공은 꽃이 아니다. 봄 천지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각양각색의 꽃들은 여름이 되면, 대부분 떨어져 사라지고 만다. 그 대신 연록(軟綠)의 어린 태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농익을 대로 농익은 녹색의 이파리들이 제 세상을 구가(謳歌)한다. 그러나 녹색이 지배하는 여름 철에도 주눅들지 않고 꿋꿋이 자신만의 자태를 뽐내는 꽃이 있으니, 석류(石榴) 꽃이 그 주인공이다. 송(宋)의 시인 소순흠(蘇舜欽)의 별장에도 석류가 꽃을 피워 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 여름 날(夏意)

別院深深夏簽淸(별원심심하점청) : 별채 깊고 깊은 곳에 여름 돗자리 시원하고

石榴開遍透簾明(석류개편투렴명) : 석류꽃 활짝 피어 주렴 안까지 밝게 비추누나.

松陰滿地日當午(송음만지일당오) : 정오에 소나무 그늘은 마당에 가득하고

夢覺有鶯時一聲(몽각유앵시일성) : 꿈을 깨어보니 꾀꼬리 나타나 가끔씩 울어라.



※ 시인은 여름 더위를 피해 평소에 머물던 거소(居所)가 아닌 별장에 와 있는데, 그 곳은 깊은 숲 속이라서 서늘한 데다, 집 안엔 여름 돗자리가 깔끔하게 깔려져 있었다. 더위를 피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더위를 피해 시원한 곳에서 마음이 편안해지자, 시인에게 정겹고 아름다운 여름 풍광이 다가왔다. 뜰에 있는 석류(石榴)는 꽃을 활짝 피웠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환하던지, 대청 문에 쳐놓은 주렴(珠簾)을 뚫고 들어와 방안까지 환해질 정도였다. 사방이 온통 짙푸른 녹색의 풀과 나무로 우거져 있는데, 그 가운데서 붉게 핀 석류꽃은 말 그대로 홍일점(紅一點)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여름에 만난, 때 아닌 상화(賞花)는 색 다른 호사가 아닐 수 없다. 집 안을 덥게 하는 햇빛 대신 주렴(珠簾) 친 방을 밝히는 것이 석류(石榴) 꽃이라고 한 시인의 말은 참으로 운치 있고 감각적이다.

시인이 묵고 있는 별장의 마당에는 정오가 되면 소나무 그늘이 가득 드리워지는데, 이 또한 시인이 즐기는, 빼놓을 수 없는 여름 풍광의 하나이다. 아직 걷지 않고 드리운 채 있는 주렴(珠簾) 사이로 들어 온 석류의 붉은 빛과 마당 가득 드리운 정오의 소나무 그늘은 풍광도 풍광이려니와, 시인의 여름 늦잠을 깨우는 자명종과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시인은 더위를 피해 별장에 왔지만, 피한 것은 더위만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번다한 잡사와 근심도 함께 피한 것이다. 한가하고 마음이 편하니,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단잠에서 깨지 않고 있었던 것이리라. 정오가 되어서야 단 꿈에서 깨어난 시인의 귀에 꾀꼬리 소리 한 줄기가 낭랑하게 들려왔다. 주렴 사이로 스며 들어와 방안을 환하게 밝힌 석류 꽃, 마당 가득 드리운 소나무 그늘, 여기에 꾀꼬리 소리까지 어우러져서야 시인의 여름은 비로소 완성된다.

여름 더위를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이런저런 방법을 찾아보곤 하는데, 깊은 숲 속의 별장을 찾아가 시원한 돗자리를 깔고 지내는 것도 그 중 하나이다. 더위를 피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여름 풍광을 즐기기까지 한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가 아니겠는가? 마당 한 가운데서 여름의 태양만큼이나 강렬한 빛을 발하는 석류 꽃은 여름 풍광의 홍일점으로 손색이 전혀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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