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침묵 (하)
위대한 침묵 (하)
  • 변정순 <수필가>
  • 승인 2014.05.18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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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변정순 <수필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지인과 함께 지난날에 찾은 문화 나들이였다.

아무런 조명도, 음향이나 음악도 없고, 말없이 보이는 장면 속에서 내레이션이나 한 줄의 설명문도 보이지 않았다. 알프스의 아름다운 풍경과 눈 덮인 수도원의 고즈넉한 모습만 화면에 가득할 뿐.  

누구도 들여다보지 못한 곳, 변화하는 계절, 해를 넘기는 속에서도 영원의 공간을 만들어 가는 곳, 카르투지오회의 그랑즈 사르트뢰즈 수도원의 일상을 그린 작품이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수도자들이 만들어 가는 시간들을 필립 그로닝 감독이 조용한 시각으로 바라본 영화다. 감독은 1984년 침묵으로의 여행을 기획하고 수도원에 촬영의사를 전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때가 아니라고 때가되면 연락하여 주겠다는 답변을 들은 지 20년을 넘어서야 영화를 완성한 것이다. 

인공조명 사용금지, 자연의 소리 이외의 어떠한 음악이나 음향도 금지, 수도원의 삶에 대한 일체의 논평이나 해설금지, 스태프 없이 혼자서 촬영할 것 등 금기사항과 촬영기간 내내 수도자들과 같은 삶을 살면서 어렵게 찍은 영화다. 그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고도의 절제된 영상미학으로 명품을 만들었다. 낡은 마룻바닥의 삐거덕거리는 소리, 눈이 내리는 소리, 늙은 수도사의 눈 밟는 소리, 나뭇잎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장작 패는 소리, 발자국 소리, 고즈넉한 수도원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다소 과장되게 표현되어 있지만 감관을 열고 들으면 그 어떤 음악이나 음향보다도 아름답다.  

눈 덮인 알프스의 계곡으로 흐르는 종소리나 조용한 기도소리, 그레고리 성가의 합창은 차라리 하늘의 음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문틈으로 흘러드는 빛을 이용하여 수도자의 일상을 조명하고, 흐르는 별빛도 훌륭한 조명이 된다. 창문으로 흘러든 석양빛 속에서도 극치의 영상미가 있다.  

저녁 기도시간의 성경과 악보를 비치는 탁상용 전등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은 압권이다. 주위는 물론 책을 읽는 수도사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오로지 책과 책장을 넘기는 손만 보일 뿐이다. 극중 중간 중간 비쳐지는 수도자의 얼굴에서 눈동자들은 무엇인가 내게 전할 말이 있는 듯하다. 수도사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주변을 산책한다. 유일하게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시간이다. 농담을 주고받기도 하고 진지하게 무엇인가를 토론하기도 한다. 눈 덮인 산기슭을 산책하던 수도자들이 갑자기 미끄러지듯이 산을 내려온다.  

수도복을 입은 엉덩이로 눈썰매를 타는 것이다. 어떤 이는 설피를 신은 채 까마득한 언덕을 서서 미끄럼을 타기도 한다. 순간 영화관에서 웃음바다를 이뤘던 우스꽝스러운 장면이었다. 그들만의 어린아이 같은 모습은 너무도 평화롭고 행복하게만 보인다고나 할까. 답답하게 진행되는 장면의 중간에 기막히게 반전을 넣은 것이다. 내가 본 영화중에서 가장 졸렸던 영화였지만 시간이 가면서 잠이 싹 달아나 버린 영화, 사건사고가 많아 마음이 심란한 요즘, 영화라는 언어를 침묵이라는 의미로 다가서서 보여 지는 것과 들리는 것을 잘 편집한 위대한 침묵. 마음속으로 다시 상영하며 마음을 정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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