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침묵 (상)
위대한 침묵 (상)
  • 변정순 <수필가>
  • 승인 2014.04.27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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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변정순 <수필가>

무엇을 구합니까?”

무릎을 꿇고 묵상기도 하는 옆모습이 보이고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뒷모습도 보이고 낡은 수도복을 걸치고 구부정한 모습으로 눈밭을 걷는 모습, 동물에게 먹이를 주려는지 뭔가를 들고 걸어가는 뒷모습, 수도사의 참모습들이 소리없이 보여진다. 독방을 사용하고 허락된 시간이외에는 서로간에 말을 하지 않고, 철저히 자연과 동화되는 고행을 통해서 구도하는 모습들이다. 1084년 설립이후 카르투지오회 수도사들이 900년 동안 변함없이 구하는 그 무엇이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는 자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들은 버림과 침묵을 통한 신과의 소통을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고 과거, 현재, 미래는 오로지 인간의 감각에 의한 분별일 뿐이다. 눈, 코, 입, 귀, 몸 등 감관을 통하여 보고, 냄새 맡고, 맛보고, 듣고, 촉감으로 느끼는 인식을 통하여 과거와 현재, 미래를 가리는 것이고 신의 세계에서는 오직 현재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모든 감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신과의 소통은 불가능 하게 되고 고요와 침묵을 나를 버리는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주님께서 이끄셨기에 지금 내가 여기 있나이다.” 수도사들은 극한의 고행과 자연과의 동화, 나를 버리는 끊임없는 수행 속에서 신과의 통로를 열고자 노력한다. 스스로의 수행을 신의 이끌음으로 보는 것이다.

“내가 바로 그분이다-나는 있는 나다.”

성경에 “네 안에 내가 있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라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오감을 비우고 나를 버리면 그때 남는 것이 무엇일까요? 신은 인간을 자기의 모습으로 만들었고 자신의 권능을 부여했습니다.

감각을 비우고 나를 버려 무아의 경지가 되면 부여된 권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스스로를 버림은 물론 내안에 강림하여 무한한 권능을 주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참된 나를 찾게 됩니다.

“눈이 먼 것도 하느님이 자신의 영혼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 허락하신 것입니다. 죽음을 왜 두려워합니까? 그것은 모든 인간의 운명입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더 행복합니다. 그것이 삶의 목적입니다.”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바위를 부수었으나 주님은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않았고 바람이 지난 뒤 지진이 일어났는데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지진이 지난 뒤에 불이 일어났는데 주님께서는 불속에 계시지 않았고 불이 지나간 뒤에 거기에서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렸습니다.”

“현재와 미래를 느끼는 것도 나의 인식이고, 바람과 지진과 불을 느끼는 것도 나의 생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인식과 생각을 없애 나를 버린다면 내안의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시작부터 끝까지 전하고자 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는 늙고 눈먼 수도사의 인터뷰 내용들이다.

이 영화에서 보이는 수도사의 생활은 위대한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희로애락 일상에 젖은 우리네가 접근하기에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매우 어려운 생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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