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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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9.28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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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문화재연구소 충주설립 환영
장 준 식 <충청대 교수>

충주는 한반도 중앙부 내륙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국원', '중심주', 또는 '중원'이라고 불리어 왔다. 이러한 충주가 '중원문화'라는 이름으로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77년 중원 미륵리의 '석실사원지'의 발굴조사로 본격적인 학술조사가 시작되면서부터다. 특히 79년에 가금면에서 '고구려비'가 발견되면서 충주가 역사·지리·문화적으로 비상한 주목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 후 충주댐 수몰을 앞두고 79년과 80년 두 차례 실시된 문화재 지표조사, 1981년 충북도가 실시한 기초조사 등을 근거로 충주지역의 유적분포도와 그 색인을 작성하였고, 이 과정에서 중원문화라는 생소한 학술용어들이 회자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중원문화라는 개념은 민간 차원에서, 지방차원에서, 일부 학계에서 주장되어 왔을 뿐 국가 차원에서 공식 인정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민선자치시대가 본격화된 후 문화의 중요성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면서 1999년말 제4차 국토종합개발계획에 중원문화권을 처음으로 포함시킨 것이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첫 번째 쾌거였다. 그 이전에는 국가에서 인정한 문화권이 6대 문화권이었는데 중원문화권을 포함, 7대 문화권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쾌거를 이루었음에도 학계에서는 중원문화의 핵심이 충주라는 개념이 정립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청주에 중원문화연구소, 중원문화재연구원 등이 발족되어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중원문화 개념의 주도권을 청주에 빼앗기는 듯한, 충주는 청주의 변방인 듯한 인식을 주고 있었다. 이는 한마디로 중원문화를 연구할 책임 있는 기관이 충주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절박한 상황에서 이시종 국회의원의 노력으로 충주에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설립이 확정되었다. 이는 중원문화란 개념을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그 중심을 충주로 확정한 두 번째 쾌거라 할 수 있다. 중원문화권이란 학술용어가 태동된 후 무려 25년만이다.

문화재청이 경주(신라), 부여(백제), 창원(가야), 나주(호남)에 이어 전국에서 5번째로 충주에 중원문화재연구소를 설립한 것은 충주시민에게도 중요하지만, 국가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는 중대 사건이다.

중원문화권의 실체를 국가가 인정하고 문화권의 정립을 위한 연구조사를 국가적 차원에서 확실하게 진행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중원문화재연구소의 충주유치는 충주시민들의 문화적 자긍심이 밑거름이 되어 이뤄낸 성과이다. 예성문화연구회를 비롯한 연구단체의 끊임없는 문화재 사랑과 활동이 일익을 담당했다고 생각된다. 특히 이 의원의 열정과 추진력에 찬사를 보낸다. 서울시가 추진한 서울문화재연구소 설립과의 치열한 경쟁에서, 이를 제치고 충주에 먼저 설립된 것은 중원문화의 승리이기도 하지만 충주시민과 지역 사학자들의 중원문화에 대한 애착의 결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충주에는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중원고구려비(국보 205호)가 위치한다. 요즘 중국은 '동북공정'이란 미명하에 역사왜곡이 도를 넘어 고구려가 자기들의 지방정권이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중국이 추진하는 동북공정이 사실이라면 고구려비가 세워진 이 땅 충주까지도 자기들 영토였는가를 반문해보며 국제적으로 역사와 강역(疆域)문제의 갈등이 심화되는 이 때, 우리지역의 문화재보존과 문화사 정리에 중심기관이 될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충주확정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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