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락된 한 달
허락된 한 달
  • 이창옥 <수필가>
  • 승인 2014.03.25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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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창옥 <수필가>

내게 시한부판정이 내려졌다. 허락된 시간은 꼭 한 달이다. 작은아이가 하얀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한 달 동안 엄마가 꼭 하고 싶은 일 열 가지를 적어보란다. 버킷리스트였다.

갑자기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 듯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한 달 동안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여행을 해보면 어떨까. 그러다 길바닥에서 생을 마감하면 내 마지막 모습이 너무 초라할 것 같아서 싫다. 가족들을 위해서 여러 가지 밑반찬을 만들어 놓을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상해버려서 못 먹게 될 것이다.

눈을 감았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기껏 한 달이라고 하는데 하고 싶었던 일과, 해야 할 일은 왜 그리 많은지 수많은 생각이 실타래처럼 엉켜버렸다. 복잡 미묘한 생각들을 고르기 위해 꼭 해보고 싶었던 일과, 꼭 해야 될 일을 정리했다.

펜을 들었다. 첫 번째, 집안정리를 해야겠다. 아깝다고 버리지 못한 것들을 정리하고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물건들만 남겨놓아야 한다. 그런 후에 홀로 동해 푸른 바다로 여행을 떠나리라. 밤새 파도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목청껏 소리를 지를 것이다. 왜 하필 나냐고, 왜 하필 지금이냐고, 마음껏 소리 지르다 보면 마음속에 남아있을 세상에 대한 무거운 미련들이 조금은 가벼워지지 않을까. 집으로 돌아와 지금까지 써놓은 글들을 정리할 것이다. 내 살아생전에 수필집으로 엮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시간이 허락하지 않으면 유고집으로 남겨도 좋으리라. 수필은 내가 이 세상을 살면서 그래도 사람다운 모습을 잃지 않고 겸허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해준 스승인 동시에 도반이었다. 수필은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한다고 믿었기에 늘 조심스럽고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했다.

버킷 리스트를 적어 내려가다 보니 어느새 아홉 칸을 채우고 말았다. 세 번째까지는 나 자신을 정리하기 위한 시간이었지만 살펴보니 나머지 칸은 온통 남편과 아이들하고 함께할 시간들로 채우고 있었다. 마지막 열 번째 버킷리스트를 적을 차례다. 다시 생각을 가다듬기 위해 눈을 감았다

오십이면 오래 살았다 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그리 짧은 삶도 아니었으니 감사한 일 아닌가. 사람의 몸을 빌려 매순간 포기하지 않고 이만큼 살아왔으면 스스로 대견하다고 칭찬해도 무방할 것 같고, 세상에 우리 부부를 닮은 아이들도 태어나 제 할 일 다하며 살아가고 있으니 그도 감사한 일인 것이다. 딱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외로움을 많이 타는 남편이다. 아이들이 외로움을 채워주면 좋을 테지만 먼저 외롭다고 손 내밀 주변머리도 없으니 아이들에게 특별히 부탁을 해야 하리라.

20대에 내 인생 좌우명은 “마치 오늘이 임종의 날인 것처럼 살아라.”였다. 내게 주어진 시간 한순간도 허투루 허비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때는 젊음이란 무기가 있어서였는지 그 말이 무서운 말인지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오십을 넘기고 느닷없이 내게 남은 시간이 한 달이라고 가정하니 정말 죽음을 앞둔 사람 심정이 이리 막막하고 고통스럽고 무서울까 싶어 숙연해진다.

심리학을 공부하는 작은아이가 내민 설문지 덕분에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 새삼 깨닫는다. 다시 펜을 들어 마지막 열 번째 버킷리스트를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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