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오는 날
봄비 오는 날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4.03.17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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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봄은 그 자체로 감각의 보고(寶庫)이다. 보이는 것은 눈을 황홀하게 하고, 들리는 것은 귀를 즐겁게 하고, 닿는 것은 살을 전율케 한다. 화창한 날은 화창한 대로 좋고, 비오는 날은 비오는 대로 좋다. 상화(賞花)니 답청(踏靑)이니 하는 봄의 의식은 화창한 날의 몫이지만, 춘사(春思)는 아무래도 비 오는 날의 몫이다. 화사함에 촉촉함을 더하는 것이 봄비요, 새싹을 틔고 꽃을 피워 봄을 성숙하게 하는 것도 봄비요, 꽃잎을 떨구어 봄을 보내는 것도 봄비 아니던가 그래서 봄비는 외양의 감각을 자극하기보다는 내면의 심금(心琴)을 울리는 봄의 연주자인 것이다. 조선(朝鮮)의 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은 그 비운(悲運)의 운명만큼이나 아련한, 봄비 오는 날의 춘사(春思)를 감각적으로 읊고 있다.

 

◈ 봄비(春雨)

春雨暗西池(춘우암서지) : 자욱한 봄비에 서쪽 못 어둑어둑

輕寒襲羅幕(경한습라막) : 으쓸하니 한기가 비단 휘장에 스미누나

愁倚小屛風(수의소병풍) : 시름 젖어 작은 병풍 짚고 서니

墻頭杏花落(장두행화락) : 담장 모퉁이로 살구꽃은 떨어지고

 

※ 이 시는 감각의 작은 조각들로 구축된 하나의 구조물(構造物)이다. 이 구조물의 접착제는 다름 아닌 봄비이다. 봄비가 맨 먼저 자극한 것은 시인의 눈이다. 시인은 방문을 열어 둔 채로 서쪽 못(西池)을 바라보던 참이었다. 아마도 그 쪽으로 누군가가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기다리는 대상이 누구인지는 중요한 시적 관심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봄비로 인해 시야가 흐려졌다는 것이다. 오지 않는 임에 대한 원망은 조금도 없다. 오로지 님 오시는 길을 잘 보이지 않게 만든, 자욱히 내리는 봄비에 대한 탓만 있을 뿐이다. 님 오시는 길을 시인의 눈이 보지 못하도록 만든 봄비는 이번에는 찬바람이 되어 방 안으로 스며들어 시인의 살갗이 차갑게 느껴지도록 만든다. 봄이라서 사라진 줄 알았던 추위는 봄비로 인해, 비록 혹한(酷寒)은 아니더라도 몸에 으쓸한 느낌이 들게 하기에는 충분하였다. 가벼운 한기(輕寒)를 몸으로 느낀 시인은 이것을 계기로 기다림을 접기로 한다. 비단 휘장(羅幕)은 혹시도 올지 모를 님을 맞기 위해 드리운 것이었지만, 오라는 님은 오지 않고, 대신 가벼운 한기(輕寒)가 느닷없이 그 밑으로 들이닥쳤으니 시인의 낙담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님이 오실 서쪽 연못(西池)을 시야에서 가린 것도, 비단 휘장에 불청객인 가벼운 한기(輕寒)을 스며들게 한 것도 모두 봄비(春雨)였다. 그러나 봄비의 훼방은 여기서 그친 게 아니었다. 기다림을 접기로 한 시인의 마음은 근심으로 천근만근 무거워서 제대로 설 수 조차 없었기에, 작은 병풍(小屛風)에 기대어 설 수밖에 없었는데, 이 병풍 또한 님을 맞이하기 위해 쳐 놓은 것이다.

시인이 병풍에 의지하여 일어난 것은 기다림을 접고 방 문을 닫기 위한 것이었는데, 일어선 시인의 눈에 담장 모퉁이로 살구꽃이 떨어지는 모습이 들어왔다. 이 또한 봄비 때문이었다. 살구꽃의 낙화(落花)는 곧 봄이 지나감을 형상화한 것이니, 결국 봄비로 인해 봄은 지나가고 만 것이 된다.

봄비는 봄을 봄답게 만드는 마술사지만, 때로는 봄을 할퀴는 심술쟁이가 되기도 한다. 특히 봄에 님을 기다리는 여인에게 봄비는 결코 달가운 존재가 아니다. 님이 오는 길목을 어둡게 하고, 꽃을 지게 하여 봄을 보내 버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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