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날
어느 봄날
  • 정명숙 <수필가>
  • 승인 2014.03.10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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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명숙 <수필가>

문자가 왔다. 날숨과 들숨이 길어진다. 마당으로 나가 문자를 다시 확인해 봤다. 두 번 본다고 달라질까. 애써 태연한 척 마당에서 서성인다.

어제보다 부드러워진 풍경위로 아침 햇살이 내려앉고 있다. 성큼 다가온 봄은 나아갈수록 확연하다. 표정은 수줍어도 발걸음은 거침이 없어 곳곳에 제 발자국을 남긴다. 초록색의 발자국, 봄은 그렇게 걸어오고 있다. 계절의 변이를 실감하는 요즘, 부드러운 훈풍이 스치고 지나간 잿빛 대지는 예외 없이 생명의 기운이 꿈틀대며 고개를 내민다. 마당을 한 바퀴 돌다 보면 마음을 다스리기엔 이보다 좋은 게 없지 싶다. 누런 잔디 속에서 파랗게 올라오는 잡초들도 반갑다. 들쑥날쑥하게 상사화가 무더기로 올라와 세상구경 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유치원생들처럼 천진스러워 보인다. 아직 찬바람은 옷깃을 여미게 하지만 나무마다 움이 돋아나 있다. 생명이 있는 것들과 교감하는 일은 마음을 평화롭게 한다는 것을 산속동네로 이사 와서 알았다. 봄의 풍경들이 잠시라도 삶의 어둠을 사라지게 한다. 평상시처럼 마지막으로 장독뚜껑을 열어놓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다시 마음위로 어둠의 낙진이 내려 않는다. 천 길 낭떠러지 앞에서 거센 바람에 맞서보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그랬을까.

부고를 알리는 문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장례식장으로 가는 길을 멈칫거리게 했다. 스스로 세상을 버린 친구의 영정 앞에 고개를 숙이는 것조차 미안하다. 벼랑 끝에서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던 것일까. 자신만 힘든 삶이라 생각하고 떠날 준비를 했던 것인가. 누구나 한 두 번은 밑바닥으로 떨어진다.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으면 다시 바닥을 딛고 올라 올 용기가 생긴다. 고된 바람으로 심신은 고통스럽게 흔들리겠지만 그 친구도 이겨내고 다시 일어서리라 기대했었다. 지금 우리는 모든 일에 움츠러드는 나이가 되어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 친구도 실패한 사업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엔 역부족이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켜만 봤다.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가까운 이들과의 갈등도 벼랑 끝으로 미는데 한몫했을 터다. 그 앞에서 얼마나 절박하고 외로웠을까. 아픈 마음으로 장례식장에 모인 친구들은 하나 같이 말이 없다. 따뜻하게 손잡아 주지 못한 죄책감에 술잔만 오고 갈 뿐이다.

이젠 우리의 곁을 떠나는 친구들이 늘어간다. 치유될 수 없는 병으로, 또는 사고로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갈 수밖에 없었을 때에는 단념하기가 조금은 수월했다. 허나 이렇게 어이없는 일이 생기면 충격은 예상외로 커서 안정을 되찾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삶이 살얼음판을 건너는 것처럼 더욱 움츠러드는 걸 부인하지 못한다.

나는 원하지 않은 길에서 좌절과 절망의 시간을 견딜 때 마음도 영혼도 하염없이 아팠다. 그래도 낙오의 쓴잔을 되작이던 시간은 결국 지나갔다. 모질게 시달리면서 강인해지는 게 사람이라 여겼다. 이마 푸르던 시절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허나 이젠 견디기엔 시간이 부족하다는 걸 안다. 그 친구에게 이런 시련이 좀 더 일찍 왔더라면 아마도 씩씩하게 다시 일어섰을 것이다.

나의 불편한 심기에도 불구하고 봄은 하루가 다르게 더 많은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 자연은 지독히도 무심해서 무정하고 매정하다. 단지 인간이 유정해서 아름다운 것이 사무치고 때로는 슬픈 것인가 보다. 다정했던 친구의 추락과 소멸이 아깝고 안타까운 봄날이다. 그가 남기고간 슬픔과 내게 남아 있는 아쉬움은 쉽게 부식되지 않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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