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인생은
그래서 인생은
  • 강희진 <수필가>
  • 승인 2014.02.27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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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강희진 <수필가>

눈 감으면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선수들의 환호가 들린다. 저 기쁨 뒤에 얼마나 많은 노력과 땀이 있었는지 절실하게 느끼곤 한다. 환호 소리의 여운에서 며칠 전 고향친구와의 전화가 생각난다.

그녀와는 담을 하나 사이에 둔 옆집 친구다. 담이라고 해 봐야 내 키밖에 되지 않아 양쪽 집 안팎 일은 그림처럼 보일 정도로 훤히 다 알았고 그만치 가까웠다. 그 집 마루에서 밥 먹으면서 달그락거리는 수저 소리까지 들렸으니 생각하면 한 식구나 다름이 없었고 특별히 나와 동갑인 그녀와는 절친하게 지냈다.

그렇지만 학교는 나보다 한해 늦었다. 몸이 약한 이유도 있었지만 더 큰 원인은 인근에 그 친구 부모가 소작을 붙일 곳이 없었다. 1970년 그 때는 소득증대의 일환으로 갯벌을 막아 논을 만들었는데 전답이 없는 친구 부모는 30 리나 떨어진 곳으로 가서 농사를 지어야 했고 친구는 결국 5명이나 되는 동생들을 돌봐야 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나랑 같이 학교를 가겠다고 나서는 딸을 그 엄마가 붙잡았다. 그러자 그 친구가 나랑 같이 가겠다고 얼마나 울었던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두 번째 기억은 고등학교 때로, 일요일 아침부터 다투는 소리가 났다. 베이붐 세대인 우리 세대는 늘 학교가 부족했다가 그 즈음 시골에 고등학교가 생기기 시작하는 추세였다. 때맞춰 우리 중학교 옆에도 새로운 고등학교가 들어섰고 친구는 그 학교를 가겠다고 우기는 중이었다. 친구엄마는 상고도 아닌 학교를 왜 가려느냐고 딸을 설득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친정아버지가 담을 넘겨다보면서 지금 세상에 고등학교를 보내지 않으면 되겠느냐고 꾸중을 내리셨다. 아버지 말씀이 옳았는지 친구의 엄마는 딸의 말을 들어 주었고 친구는 마침내 원하던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 학교는 인문계였다. 친구는 그처럼 원했던 학교는 갔지만 대학은 도저히 갈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취업을 위해 일찌감치 학원을 다니면서 상고생들이 배우는 주산과 부기를 익혔다. 그 결과 주산과 부기 1급을 졸업 전에 땄다고 자랑을 하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녀는 좋은 배우자를 만났고 아들과 딸도 국내 유명대학을 나와 좋은 곳에 취업을 해서 홀가분하게 여행을 즐긴다고 했다. 기대를 했던 후배들은 나처럼 평범하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말끝에 그녀는 내가 음성에서 살고 있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놀란다고 하면서 계속 시골에서 살 거냐고 물었다. 다른 사람의 기억에는 그 때와 현재의 내가 상당히 차이가 있는 모양이다. 열악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제법 성공한 그들로서는 현재의 내가 좀 의아했을 것이다. 그래서였는지 그들의 성공에 찬사를 보내지 못했는데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선수들을 재조명하는 프로그램을 보고 그들이 목표를 위해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선수들의 대부분은 타고난 재능보다는 피나는 땀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후일담을 들으니 얼핏 고향 후배들의 삶이 오버랩 되었던 것이다. 자칫 개천에서 용 났다고 쉽게 말할 수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순탄하게 학교를 졸업한 나보다 월등 성공한 것은 가난을 딛고 악조건을 극복하는 의지가 아니면 불가능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인생은 끝까지 살아봐야 혹은 밥숟갈 놓아봐야 안다고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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