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정월 대보름
  • 변정순 <수필가>
  • 승인 2014.02.16 18: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변정순 <수필가>

“마침 집에 있었네, 떡 해 먹었어?”

대답할 사이도 없이 뒷집 형님이 떡 한 접시를 내미셨다. 대보름 떡이다. 가정에서 떡을 해 먹는 집은 거의 없는 시대지만 지금도 형님은 대보름 떡을 손수 만드신다. 입맛은 어찌 잘도 변하는지 전에는 먹지 않던 콩떡이 참 맛있다.

예전의 정월 열나흗날의 풍경을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식전부터 대청마루에는 몇 개의 떡시루가 놓여 있었다. 우리 집 여인들은 쌀가루와 붉은 팥고물을 찧어 대보름 떡을 만들었다. 쌀가루 한 켜 고물 한 켜씩 시루에 얹다 보면 할머니의 흰머리는 더 하얗게 변해 있었다. 시루가 다 차면 가마솥에 안쳤다. 김이 새지 않도록 밀가루 반죽으로 시루 본을 붙이고 긴 시간 불을 때 익혀 안방 아랫목에 놓고 어른들은 절을 하셨다. 집안에 액운이 없기를 기원하면서.

시루떡을 여러 개의 그릇에 담아 광과 헛간, 장독대, 곳간, 건조실, 집안 곳곳에 갖다놓아 터주님께 올렸다. 엄마는 부엌에서 묵나물과 시래기, 고사리 삶아 무치고 오곡밥을 지었다. 나무 아홉 짐을 하고 아홉 그릇의 밥을 드셔야 할 아버지 때문에 더 많은 음식을 준비하셨는지도 모른다.

이날 잠을 자면 눈썹이 센다고 못 자게 해서 어린 나는 밤에 꼴딱 새우기도 했다. 심술이 발동한 오빠와 나는 참지 못해 자고 있는 동생들의 눈썹에 밀가루를 바르기도 했고,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다 울음보를 터트리는 걸 보면서 배꼽을 쥐기도 했다. 엄마는 대문 옆에 체를 걸었다. 집에 들어오려는 귀신이 촘촘한 체 구멍을 세느라고 날이 새면 가 버린다나.

대보름날에는 귀가 밝아지고 일 년 동안 즐거운 소식을 듣는다하여 귀밝이술도 나이 순서에 따라 한 모금씩 마셨다. 나이를 불문하고 음주가 허용되는 날이었으리라. 땅콩과 사탕 같은 부럼도 깨물었다. 저녁이 되면 또래의 친구들은 약속을 하지 않아도 큰 느티나무 마당에 모이게 된다. 큰 달을 제일 먼저 빨리 볼 수 있는 산등성이로 우르르 올라가, 솟아오르는 대보름달을 바라보며 두 손 합장하고 소원을 빌었다. 어린 나는 그때 무엇을 빌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지만 공부 잘하게 해 달라던가 운동회 날 달리기 일 등을 하게 해 달라는 소원이었을 것이다. 달빛은 어둠과 질병, 재액을 밀어내는 밝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어느새 마을 한가운데에서는 어른들이 달집을 만들어 태우기도 했다. 말이 달집이지 참나무 장작불에 생솔가지 꺾어다 추워 얼어붙은 몸을 녹이느라고 피웠던 것 같다. 우리는 찌그러진 깡통을 주워 양옆에 철사를 꿰어 손잡이를 만들고, 바닥은 송곳으로 숭숭 뚫어 불구멍을 내서 망우리를 했다. 불쏘시개로는 짚과 솔방울이었다. 얼굴은 숯 검둥이가 되건 말건 신이 났고, 불장난 많이 하면 오줌 싼다고 어른들의 걱정 어린 말씀을 들으면서도 더 신 나게 돌렸다. 떨어지는 불씨에 옷이며 머리카락 태우고 남의 논두렁과 집동 가리를 태우기도 했다.

정월 대보름달이 차오르는 날, 망우리 들고 나가 예전의 그 날처럼 신 나게 돌려 보고 싶다. 그러나저러나 형님이 떡 가져오신 접시에는 무엇을 담아드리면 좋을까.

부럼으로 땅콩과 호두를 담아드리면 좋겠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