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과 귤
한겨울과 귤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4.01.13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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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동장군이 맹위를 떨치는 한겨울에도 꿋꿋이 자신의 기품을 지키는 소나무와 측백나무(松柏)를 사람들은 세한심(歲寒心)이 있다고 칭송한다. 과연 이 나무들에게 한겨울의 추위를 아랑곳하지 않는 기개(氣槪)가 있는 것일까? 아마도 그렇게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이 부여한 의미일 뿐이다. 그래서 소나무나 측백나무가 아니더라도 상록(常綠)의 나무나 겨울철에 꽃을 피우는 초목을 보고도 세한심을 느끼는 사람도 많이 있다. 당(唐)의 시인 장구령(張九齡)은 단귤(丹橘)나무에서 세한심을 느꼈다.

◈ 감우사수지사(感遇四首之四)

江南有丹橘(강남유단귤) 강남에 단귤나무

經冬猶綠林(경동유녹림) 겨울이 지나도 푸른 숲이네

豈伊地氣暖(개이지기난) 어찌 그 땅의 기운이 따뜻함이리오

自有歲寒心(자유세한심) 스스로 추위 이기는 마음이 있어서지

可以荐嘉客(가이천가객) 반가운 손님에게 자리를 깔 수 있건만

奈何阻重深(나하조중심) 어찌하여 장애가 그리도 심하고 깊은가

運命惟所遇(운명유소우) 운명이란 우연히 만나는 것

循環不可尋(순환부가심) 돌고 돌아 억지로 찾지는 못하리

徒言樹桃李(도언수도리) 부질없이 복숭아와 오얏만 심어라 하지 말라

此木豈無陰(차목개무음) 이 나무엔들 어찌 쉴만한 그늘 없으리

 

※ 이 시에서 강남(江南)은 장강(長江) 이남의 땅을 말하는 것으로 흔히 소주(蘇州), 항주(杭州)를 일컫는 말이다. 이 지역은 겨울에도 날씨가 온화해서 귤(橘)나무가 잘 자란다. 장강(長江)보다 북쪽에 위치한 회수(淮水)를 건너면 귤이 탱자가 된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귤(橘)나무는 추운 북쪽 지역에서는 아예 자라지를 않는다.

그러나 시인은 귤(橘)나무가 겨울에 푸른 것은 지역적 기후 특성 때문만은 아니라고 설파한다. 아무리 지역이 남쪽이고, 날씨가 따뜻하다 해도 이것만으로 귤나무의 상록(常綠)이 설명되지 않는다. 스스로 추위를 이겨내려는 의지 즉 세한심(歲寒心)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강남(江南) 지역에서는 단귤(丹橘)나무가 겨울에도 파란 잎을 드리우고 있는데 이는 귀한 손님이 오면 그늘을 드리운 자리를 마련해줄 수 있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귀한 손님은 좀처럼 오지 못한다. 왜냐하면 심하고도 깊은 험지(險地)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표현은 물론 훌륭한 분을 모실 기회가 봉쇄된 시인의 불우한 처지를 빗대서 말한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불우함을 운명의 소산으로 돌리면서 아무리 돌고 돌아도 억지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고 체념한다. 그러면서도 못내 아쉬운 듯 한마디 내뱉는다. 복숭아나무나 오얏나무만 심으라고 권하지 말고 단귤(丹橘)나무도 심으라고 권하라는 것이다. 이 나무 밑에도 사람이 쉴만한 그늘이 잘 드리워지기 때문이다.

엄동설한에도 불구하고 파란 잎을 지니고 있는 나무를 사람들은 세한심(歲寒心)이 있다고 칭송한다. 흔히 이런 나무로 송백(松柏)을 들지만 강남(江南) 지역의 단귤(丹橘)나무도 훌륭한 세한심(歲寒心)을 지니고 있다. 또한 여름에는 도리(桃李) 못지않은 그늘을 제공하고 있으니 쓸모도 훌륭하다. 겨울엔 세한심(歲寒心)의 송백(松柏)이요, 여름엔 그늘이 좋은 도리(桃李)인 것이 다름 아닌 단귤(丹橘)나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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