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의 자배기
외할머니의 자배기
  • 이효순 <수필가>
  • 승인 2014.01.12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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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이효순 <수필가>

새해가 되어 집안 정리를 하려 거실을 살폈다. 피아노 아래 자배기 속에 작은 알갱이의 스티로폼 봉지가 담겨 있었다. 벌써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꽤 오래되었다. 택배 부칠 때 포장지 속에 완충용으로 사용하려 두었던 것인데 청소할 때마다 정리한다 한 것이 해를 넘기고 말았다. 며칠 전에 그 봉지를 꺼내며 자배기(옹기)를 자세히 보니 손잡이 사이에 실금이 가서 순간접착제로 바른 자국이 있다. 난 그 그릇을 들고 주방 개수대에 가서 물을 담아 보았다. 실금이 난 곳으로 물이 조금씩 새어 나왔다. 물을 모두 쏟고 그릇을 들어 전등불에 비추어 보니 벌어진 틈새가 두 곳이 하얗게 보였다. 접착제를 찾아 그곳을 바르고 때웠다. 이렇게 해서라도 그 자배기를 보관하고 싶었다.

자배기는 내가 고3 때 함께 사시다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손길이 묻어 있는 그릇이기에, 오래전 친정 갔을 때 장독대에 놓여있던 것을 가지고 온 것이다. 어머니께서 그것은 외할머니가 쓰던 그릇이라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 밥 지을 보리쌀을 넣고 물에 불려서 손으로 닦아 씻어냈다고 하셨다.

사진 한 장 남지 않은 외할머니가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 영정 사진이 친정집 윗방에 돌아가신 아버지 사진과 함께 걸려 있었다. 그 후 그곳이 개발되면서 내가 결혼해 객지에 살 때 가족들이 이사하며 사진을 모두 잃어버렸다. 문득 할머니가 보고 싶을 때 사진이라도 보면 마음이 덜 서운할텐데 아무 흔적이 없으니 안타깝기만 했다. 낡은 사진이라도 한 장 있으면 좋으련만, 그것을 사진관에서 복원하면 될텐데…. 아쉬웠다.

지난 가을엔 작고하신 친정 부모님 사진을 동생이 찾고 있었다. 마침 내가 간직한 낡은 앨범 속에 한 장 있는 빛바랜 사진을 사진관에 알아보니 복원하여 다시 확대할 수 있다고 하였다. 반가운 마음에 사진 열 장을 인화하여 동생과 조카, 우리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자배기를 보니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우리 동네 양짓말에 우물이 한곳 있었다. 그 우물은 우리 마을의 식수원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물지게나 물동이를 이고 물을 길어와 집에서 음용수나 음식 만들 때 사용하였다. 어른들 가는 길에 따라가서 한번 해 보고 싶어 외할머니를 조르니 외할머니는 그 자배기를 내 머리에 작은 똬리와 함께 얹어주셨다. 머리에 이니 빨리 걸을 수 없었고 자배기에 물을 반 정도 담고 이고 오는데 출렁거려 어깨 위로 흘러내리기도 했다. 그 후로는 다시 그 일을 하지 않았다.

자배기는 흙으로 빚어 구워 유약을 바르지 않아 편안해 보이는 빛깔로 마음에 드는 질그릇이다. 보면 볼수록 순한 빛깔이 할머니의 따뜻한 정이 담긴 것 같아 마음 까지 편안해진다. 몇 년 전엔 그곳에 금붕어를 키웠고 그때 물을 갈아주다 부딪쳐 금이 가서 화분으로 쓰려 했었다. 화분으로 사용하기엔 크기도 적당하지 않았다.

집에서 기르는 구피가 새끼를 많이 낳아 그곳에 분가를 시키려던 중이다. 접착제를 발라 말린 뒤 물을 자배기에 담아보니 새지 않는다. 여기저기 자국이 조금씩 있어 깨끗하진 않지만 그래도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자배기에 가득 담긴 물을 바라본다. 그곳에 할머니가 계시는 것 같다. 40년이 훌쩍 넘은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 내 곁에 계시는 할머니의 끈끈한 정이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 같다. 버리지 못하고 곁에 두는 외할머니의 자배기, 혈연으로 맺어진 정은 오래오래 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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