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하지 않으려고
후회하지 않으려고
  • 정명숙 <수필가>
  • 승인 2013.12.26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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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명숙 <수필가>

눈이 내린다. 몸은 춥고 미처 녹지 않은 눈 위에 새로운 눈이 쌓여가니 풍경이 을씨년스럽다. 눈과 추위는 며칠 남지 않은 한해의 마지막기운을 끌어안고 소멸시키고 있다. 살아있는 모든 것 숨죽여 숨어 있는 깨끗한 눈 속에서 또 다시 한해와의 이별이 기다린다. 한번 떠나가면 돌아오지 않을 기다림의 여지가 없는 이별이다.

겨울의 한 극점인 동지 날이었다. 친정어머니가 부르셨다. 팥죽 쑤었으니 와서 먹고 가란다. 당신 몸도 불편하시고 날도 추운데 뭣 하러 팥죽을 하느냐고 했다. 괜찮다고 하신다. 점심시간에 맞춰 친정에 도착했다. 어머니는 팥죽도 쑤어놓고 따로 돼지삼겹살도 사다 놓으셨다. 시부모병수발에 지친 딸에게 먹이고 싶어서란다. 팔순을 넘기신 어머니가 이순을 넘긴 딸이 안쓰러워 팥죽을 핑계로 부르셨다는 걸 안다. 동생들도 모였다. 자식이 모이니 아버지의 얼굴에 웃음이 핀다.

아버지께서 직접 수확하신 팥이다. 맛있는 팥죽과 동생이 오면서 떠온 회 한 접시, 그리고 돼지고기는 수육으로 만들어 상에 올려졌다. 푸짐하다. 오랜만에 왁자한 풍경이다. 우리는 부모님과 함께 밀린 이야기를 나누며 아무 것도 아닌 일로 목소리를 높이고 크게 웃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나는 동생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네비게이션이 없어서 부모님 모시고 멀리 여행을 떠나지 못하니 누군가 같이 가주면 좋겠노라고 했다. 바다구경을 시켜드리고 싶지만 엄두가 나지 않아 청주주변만 뱅뱅거리곤 했었다. 동생들은 선뜩 같이 가자고 한다. 그 순간 부모님의 얼굴표정이 수학여행갈 아이처럼 환해지신다. 삽교천으로 크리스마스 날 떠나기로 했다.

당일 날, 출발시간이 가까워 오자 친정어머니가 먼저 전화를 하신다. 두 분께서는 일찍 준비를 끝내시고 자식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차를 타고 바깥구경을 나간다는 것만으로도 좋으시단다. 마음은 예전과 같아도 몸을 마음대로 부리지 못하니 오죽 답답하시랴. 삽교천에 도착해서는 걸음걸이가 불편하신 어머니를 조카가 손을 꼭 잡고 다닌다. 바닷가를 산책하는 동안 자식들은 군밤도 사드리고 부드러운 엿도 사드리며 보조를 맞춘다. 부모자식이 함께 행복한 시간이다.

아버지는 보기 드문 효자셨다. 일찍 혼자되신 할머니의 말씀을 거역한 적이 없고 오남매를 낳아 기르시면서 자식들에게 큰소리 한번 내지 않으셨다. 속 썩이는 자식이 있으면 헛기침 한 번 하시면 그만이었다. 그저 지켜만 보셨다. 칭찬하는 일에는 인색하지 않으셔서 작은 일에도 같이 기뻐하시는 분이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자식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모성으로 키우지만 내 어머니는 참으로 유별나셨다. 어떠한 일에 자식이 불리한 듯싶으면 경우라는 것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자식 편을 들어 어느 때는 난감하기도 했었다. 그러한 부모 밑에서 자란 우리는 부모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동생들도 억지로 효자노릇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을 다 한다. 어느 때는 지나치게 챙겨서 오히려 올케들 보기가 민망할 때도 있다. 나는 진담을 농담처럼 동생들에게 말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장례비용을 보태지 않을 것이라고. 살아 계실 때 그 돈을 미리 쓸 것이라고 한다. 아직 정정하실 때 맛있는 것 사드리고 여기 저기 구경시켜드리고 싶어서이다. 나는 오남매 중에서 제일 많이 애를 태우고 잠 못들 게 했었다. 지금까지 아픈 손가락인 내가 살아 계실 때 조금이라도 보상을 해드려야 하는데 남아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아 애가 타기도 하고 내 마음대로 되질 않아 때로는 속이 상하기도 한다.

부모님도 떠나시면 기다림의 여지가 없는 이별이 될 것이다. 덜 후회하려고, 덜 서러워하려고 이러는 내가 이기적인지 모르겠으나 부모는 내 생애 제일 크고 깊은 인연으로 만났다는 것만 생각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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