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를 뽑으며
배추를 뽑으며
  • 김용례 <수필가>
  • 승인 2013.11.2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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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용례 <수필가>

올해는 첫눈이 확실하게 내렸다. 첫눈이 내린다고 여기저기서 문자가 들어오고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온다. 나는 반갑기도 했지만 한편 심란하기도 했다. 김장도 해야 하고 교정보던 책도 마무리해야 하고 할 일은 태산 같은데 겨울이 코앞으로 바짝 붙은 것 같아 몸이 단다.

밭에서 눈을 맞고 있을 배추 걱정에 잠도 오지 않았다. 난생 처음으로 내가 심고 가꾼 배추가 눈을 맞으며 추위에 떨고 있다. 옥수숫대 베어 낸 자리에 배추모를 심고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았다. 땅내도 맡기 전에 배추벌레와 달팽이가 달라붙었었다. 아침마다 나무젓가락으로 벌레들을 잡아냈고 물을 주었다. 그렇게 키웠다.

올해는 배추농사가 풍년이라 값이 싸다지만 그럭실에서 내가 키운 배추는 여느 배추와는 다르다. 청정지역 그럭실에서 무농약으로 기른 고랭지 배추인지라 상품가치는 없지만 우리 먹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수확하는 기쁨이 크다. 농약 없이 길렀고 메뚜기와 여치, 달팽이가 갉아 먹어 구멍이 숭숭 뚫리고 포기가 작아 볼품이 없다. 속없는 우리내외처럼 속도 차지 않았다. 그래도 노란 배추 속은 고소하고 달짝지근하여 맛은 그만이다.

혹여 첫눈에 얼어 버릴까 불안해서 오늘 배추를 뽑았다. 시장에 나오는 속이 꽉 찬 배추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작다. 작은 배추 포기마다 하얀 눈이 소복이 쌓였다. 면사포를 쓴 신부처럼 얌전하다. 얌전하고 예쁘던 신부도 아이 낳고 10년 정도 살다보면 신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남편을 이기려들고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는 거칠고 무서운 여자, 엄마가 되어간다.

배추 속을 감싸고 있는 겉잎을 베껴내며 어머니 생각을 했다. 추위를 막아주고 세파로부터 자식들을 아니 가정을 보호하는 어머니의 치맛자락. 하얀 눈을 쓰고 있는 배추가 속은 차지 않았지만 작은 몸집에 비해 겉잎이 여자들의 한복치마폭처럼 넓다. 살아남기 위한 보호본능이 느껴진다. 맨 몸으로 바람을 막고 있는 모습이 마치 어머니 같아 애처롭다. 이 험한 세상에 아이들과 남편을 지키려면 하얀 신부처럼 고개 숙이고 얌전해서는 온전히 지켜내기가 힘들다는 것을 나도 살아가면서 알았다. 배추를 뽑을 때도 속을 보호하기 위해 겉잎을 남긴다. 김치를 담글 때 속을 넣은 양념이 떨어지지 않도록 감싸고 먹을 땐 뒤로 젖혀 놓는 것이 겉잎이다. 끝내 버려져도 끝까지 속을 보호하는 겉잎은 어머니다. 내 모습이다.

나는 오십 중반이 넘어가도록 내손으로 김장 한번 제대로 하지 않았다. 친정어머니 김장하시는 날 거들어 주는 척하고 일 년치 김치를 가져다 먹었다. 친정어머니가 해마다 담가주시는 백김치를 가장 좋아한다. 알맞게 익었을 때 톡 쏘는 백김치국물은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올해는 내손으로 김장을 담글 것이다. 국물 자박자박하게 담가놓았다가 오늘처럼 눈이 내리는 날 군고구마와 백김치 쭉쭉 찢어 먹으며 겨울 한 철을 보낼 것이다. 김치를 맛있게 담가 어머니께 드려 봐야겠다. 배추 몇 포기는 신문지에 꼭꼭 싸서 잘 보관하였다가 제사 때 누름적도 지지고, 삼겹살 구워 먹을 때 상추대신 배추쌈으로 먹어도 좋겠다. 배추의 쓰임새는 참으로 다양하다. 된장 풀어 배춧국을 끓여도 시원하고 살짝 데쳐서 나물로 무쳐도 맛있고 전골에 넣으면 맑은 국물이 시원하다. 배추를 뽑으며 겨울이 두렵지 않다. 마치 곡간에 곡식을 쌓아 놓은 것 같이 흐뭇하다.

첫눈은 오는 둥 마는 둥 해서 누구는 눈이 왔다고도 하고 누구는 안 왔다고도 하는, 첫눈은 그렇게 감질나게 내릴 때가 많았다. 그런데 올해는 주먹만 한 함박눈이 하루 종일 아니 늦은 밤까지 내렸다. 나는 배추를 뽑으며 무엇이든 자기 손으로 해보는 것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꼈다. 배추를 뽑으며 벌써부터 김장 담글 생각에 마음이 들뜬다. 나도 첫눈이 내린다고 들떠있는 그들에게 하얀 면사포를 쓰고 있는 얌전한 배추를 사진 찍어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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