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겨울과 서리
초겨울과 서리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3.11.25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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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비록 짧아지긴 했지만 아직은 봄 가을이 엄연히 있다. 봄이 왔다 싶었는데 이미 여름이고, 가을인가 싶었는데 이미 겨울이다. 세월의 덧없음은 늘 느끼는 것이지만, 봄 여름이 바뀌는 초여름과 가을 겨울이 바뀌는 초겨울에 특히 그 느낌이 절실하다. 초여름과 초겨울을 비교하면, 초겨울이 더 심할 듯한데, 이유는 한해가 지나가는 느낌이 겹쳐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초겨울에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은 무엇일까?

당(唐)의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이렇게 초겨울을 읊고 있다.

◈ 초겨울, 술은 익어가는데(冬初酒熟)

霜繁脆庭柳(상번취정류) : 서리는 자주 내려 뜰의 버들 잎 무르게 하고

風利剪池荷(풍리전지하) : 바람은 날카로와 연못의 연꽃을 잘라내네

月色曉彌苦(월색효미고) : 달빛은 새벽이 되니 더욱 맑고

鳥聲寒更多(조성한경다) : 새소리는 날 차가워지니 더욱 곱네

秋懷久寥落(추회구요낙) : 가을 그리운 마음은 오래도록 쓸쓸한데

冬計又如何(동계우여하) : 겨울 생계는 또 어떻게 해야 하나

一甕新醅酒(일옹신배주) : 항아리 하나 가득 새로 빚은 술 있으니

萍浮春水波(평부춘수파) : 마름 떠다니는 봄 연못 물결 같구나.

 

※ 초겨울에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서리이다. 산이며 들이며 메마른 풀과 나무마다 내려앉아 하얀 꽃을 피워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시인의 집 안 뜰에 있는 버드나무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버드나무는 초봄에 버들개지로 극적인 등장을 한 뒤로 연록의 가느다란 잎으로 봄 여름 가을을 꿋꿋하게 지내며 마당 한켠을 지켜온 터였다.

이러한 버드나무가 그 연약한 듯 질긴 잎사귀를 땅에 내려놓으려고 하는 것은 바로 초겨울 들어 부쩍 잦아진 서리 때문이다. 초겨울의 심술은 서리만이 아니다. 바람 또한 비수를 품은 것처럼 날카로와져 초겨울의 심술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엊그제만 해도 예의 널따란 잎으로 녹색의 기개를 한껏 뽐내던, 마당 연못의 연(蓮)의 줄기가 가위질을 당한 것처럼 잘려나간 것이다. 그러나 초겨울이 심술만 부리는 것은 아니다. 새벽이면 어느 때보다도 달빛이 맑아지는가 하면, 차가워진 날씨에 새소리가 더욱 고와지는 것은 초겨울이 베푸는 선물이다. 마음에도 변화가 일기는 마찬가지이다.

이제 막 지난 가을의 일들이 벌써 그리워져 마음에 언제까지나 쓸쓸함이 가실 것 같지가 않다. 그리고 이미 눈앞에 와 있는 겨울나기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무겁기만 한데 이 모두가 초겨울의 심사(心思) 아니던가? 이러한 마음의 그리움과 무거움을 풀 수 있는 것은 시인에게는 아무래도 술이다. 이제 갓 빚어낸 술이 한 항아리 가득 차 있는 모습에서 시인은 큰 안도감을 느끼게 되었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시인의 눈에 그 술의 모습이 마치 봄물 물결에 마름 풀이 떠 있는 것처럼 보였을까?

풀마다 나무마다 하얗게 서리가 내리는 초겨울에는 부쩍 차가와진 날씨와 스산한 풍광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쓸쓸함을 느끼게 하고 겨우살이에 대한 걱정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세상일은 걱정만 하고 있어서는 되는 게 없는 법이다. 초겨울 새벽의 밝은 달과 쌀쌀한 날 더 즐겁게 노래하는 새소리에 위안을 얻고, 소박한 술 한 잔으로 마음을 위로하는 지혜가 절실한 철이 바로 초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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