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골의 가을
피아골의 가을
  • 신금철 <수필가>
  • 승인 2013.11.1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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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신금철 <수필가>

가을이 떠났다. 이제 텅 빈 들판엔 벼들이 잘려나간 밑둥만 슬쓸한 논을 지키고 나뭇잎을 떨구어낸 나목들은 긴 목을 빼고 하늘을 향해 외로움을 달래고 있다.

첫 눈이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내렸고 사람들은 나풀거리는 털로 목덜미를 감싸고 두터운 옷을 입고 움직임도 둔해졌다.

아직은 봄을 기다리기보다는 풍요롭고 행복했던 가을을 반추하고 싶어 지난 가을 다녀온 피아골을 떠올린다.

피아골엔 관람 제한이 없는 무료입장의 가을 대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현란한 춤사위도 없고 고운 소리도 없이 그저 아름다운 단풍의 빛깔로 수많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인간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멋진 공연이었다.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가슴 설레었던 공연이기에 나는 웃음과 감동으로 피아골의 단풍축제에 빠져들었다.

전 날 촉촉히 내린 비에 정갈하게 몸을 씻고 단장을 마친 멀리 펼쳐진 산자락의 파스텔 무대 위에는 안개가 나풀거려 함께 춤을 추어 신선이라도 내려올 듯 신비스러웠다.

산 사이로 구름이 내려 앉아 흥을 돋우고 노란 은행잎은 빨간 단풍잎을 더 돋보이게 해주려 애쓰고 노란 은행잎은 단풍잎의 배려에 더욱 붉었다.

투명한 가을 햇살은 이들의 우정을 위해 코발트빛 하늘을 선물로 주어 공연을 더욱 성공적으로 이끌어주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이토록 아름다운 공연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먹을거리를 주시기 위해 들녘 하나 가득 풍요로운 곡식과 푸른 채소들을 준비하시어 우리를 살찌우시니 이에 감사함도 잊지 않았다.

자연은 하느님의 섭리에 거부하지 않고 순응한다. 그 분이 정해주신대로 계절 따라 차례를 지켜 싹 틔우고 잎과 꽃을 피워 인간들에게 보는 기쁨을 주고 거기에 열매까지 다 내주어 인간들을 살찌우고 한 생을 마감한 후 다 떨구면서도 아쉬움을 모른다.

다투고 싸움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인간 세상에 경종을 울려줌이 아닐까?

계곡사이로 시리도록 맑은 물엔 나뭇잎배가 가끔씩 헤엄치는 물고기들과 숨바꼭질을 하며 내 마음에 평화를 주었다. 가슴이 답답하도록 욕심과 미움이 가득한 내게 다 버리고 가라고 속삭인다. 가을에게 나를 맡기고 동화되어 즐겁게 콧노래를 불렀다.

1박 2일의 피정을 위해 피아골의 피정의 집(천주교에서 운영하는 명상의 집)에 도착하니 마당에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이 내려 더욱 아름다운 빛깔의 단풍들이 나를 맞아주었다.

피정의 집에 올 수 있도록 나를 불러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저녁 강론을 들었다. 왼손만 십자가에 달리시고 오른손을 내리신 특이한 예수님의 모습이 제대 위에 놓여진 성당에서 신부님의 강론은 나를 숙연하게 했다.

“아름다운 단풍도 많이 보시고 인생의 단풍도 함께 생각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섭리에 따르는 것이요. 침묵은 하느님의 무릎에 편히 앉아 있는 것이니 욕심을 내려놓고 침묵 중에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신부님의 말씀을 들으니 단풍이 곱게 물드는 자연현상도 인생의 단풍 시기를 맞게 된 나의 삶도 그저 섭리에 따르는 것임을 깨달았다.

내가 세례를 받게 된 것도 옆에 앉은 남편과 결혼을 하게 된 것도 그 곳에 간 것도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였음에 순응하며 내 인생의 가을을 아름답게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곱게 물든 가을 단풍처럼 아름다운 삶, 그것은 아마도 이기심과 욕심을 버리고 자신보다는 다른 이를 기쁘게 해주는 희생의 삶이 아닐까?

이제 하느님께서는 온 세상의 더러움을 가끔씩 흰 눈으로 씻어주실 백설의 공연을 준비하고 계시겠지?

깊은 겨울이 오기 전에 내 인생에 겨울이 와도 당당하게 맞을 수 있는 뿌리 깊은 믿음을 더욱 키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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