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가 어때서
내 나이가 어때서
  • 이재성 <수필가>
  • 승인 2013.11.18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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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재성 <수필가>

친구 종무가 재 취업을 했다고 했을 때 나는 기뻐했다. 정년으로 직장을 그만 두고 일년 남짓 취미생활을 즐기며 편히 쉬고 있는 줄 알고 있던 친구다. 두 손을 잡고 진심된 마음으로 축하를 해 주었다. 좀 과장 돼 보이기는 했겠지만 내 허풍이 허풍만은 아닌 것 같아 보였는지 그 친구도 더욱 신바람을 냈다.

내가 늙은 건 아니지만 나이가 먹었다고 느낄 때가 있다. 친구들이 정년 퇴직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 나이도 꽤 들은 모양이구나 덩달아 생각한다. 나를 부르는 호칭이 진화하거나 퇴화할 때 나는 또 내 나이의 변화를 느낀다. ㅇㅇ씨, ㅇㅇ고객님에서 사장님, 선생님으로 불리기도 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선생님으로까지 진화했던 것이다. 내가 언제 사장님이 되고 선생님이 된 적이 있었을까 마는 너무 흔하고 보편적 존칭으로 자리 잡은 그간의 사회적인 현상이라 그러려니 하고 싫지 않게 받아 들이며 즐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화하는 것 보다는 퇴화한다는 건 슬픈 일이다. 이미 난 모든 젊은이들에게 공동 아버님이 되어 여길 가나 저길 가나 아버님이라 불린다. 슬픈 일이다. 친절하고 싹싹하며 예의 바른 젊은 친구들일수록 나를 퇴화시킨다. 이제는 어르신,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퇴화했다. 이건 더욱 슬픈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친구들을 무례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다. 고마운 일이다. 다만 내 자신이 노화돼 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슬픔 일뿐이다.

노후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궁리 끝에 농사를 짓기로 마음먹고 시작한지 이태가 되었다. 나 만의 생각일 테지만 젊은 사람 못지 않은 열정과 패기로 농사를 즐긴다. 구두보다 장화가 편하고 말쑥한 정장차림보다 흙 묻은 작업복이 더 편해졌다. 헬스장에서 흘리던 땀보다 흙 범벅이 되고 소금에 절어 끈적한 땀을 씻어 낼 때 더욱 뿌듯하고 개운함을 느낀다. 애당초 난 농사꾼 체질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그러나 불편한 점도 없는 건 아니다. 내가 가장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외출하는 일이다. 급작스레 볼 일이 생긴다거나 생각지 못했던 약속이 생겨 흙 먼지 털 새 없이 시내라도 나갈 참이면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저 버리는 것같아 아주 불편하다.

촌음(寸陰)을 다투던 지난 봄, 관공서에 근무하는 동창녀석이 궁금하여 지나가는 길에 불쑥 찾아 갔다가 낭패를 본 적이 있다. 털고 닦느라 공을 들였건만 어디로 숨어 따라 들어 왔는지 진흙 서너 덩이가 빚 받으러 온 사람처럼 반질반질한 대리석 바닥에 염치없이 벌렁 누워 뒹구는 게 아닌가. 얼마나 무안하던지!

그날 그 친구가 우스개 소리처럼 했던 말이 지금도 여운으로 남아 있는 건 내 팔랑 귀 탓인지도 모르겠다. “너 미쳤냐?” 나보고 미쳤단다. 이 나이에 왜 사서 생고생을 하냐고 했다. 농지에 대한 정보를 호구 조사하듯 캐 묻더니 팔아서 노후생활이나 즐기란다. 즐기라는 노후생활이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으나 피골이 상접하도록 꾀죄죄한 내 모습에 안쓰러워 하는 마음이 역력하다. 고마운 말이다. 그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인가. 걱정해 주는 모든 이들이 그저 고맙다.

의학이 번개 튀듯 발달하고 있다. 그 덕으로 우리나라의 기대 수명이 백세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또 이십 년이 지나면 그 기대치가 백이십 세가 되고 백오십 세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금까지 살아 온 만큼의 긴 세월이 아직 남아 있다. 그 많은 세월을 그냥 숨만 쉬며 맥을 놓고 살아야 하는 건 고문이다.

생산적 할 일이 없는 삶은 고독한 일이다. 나는 아직 팔팔한 청춘이다. 내 눈에 보이는 내 모습은, 마음도 삼십 년 전이요, 모습도 삼십 년 전 그대로이다. 변한 것이 있다면 불안한 마음으로 툴툴거리며 나를 바라보는 우리 집 애들이나 주변사람들의 시선이다.

인생 사는 연습을 이제 겨우 끝내 놓은 내 나이가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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