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흥취
가을의 흥취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3.11.04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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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가을은 어쩔 수 없이 타향과 연계되곤 한다. 부쩍 쌀쌀해진 날씨만큼이나 사람들의 마음은 쓸쓸해지기 쉬운데, 타향에서 가족과 떨어져 외롭게 있다 보면, 쓸쓸함은 곱절로 커진다. 이 때 타향은 고향에서 멀수록 그리고 그곳이 험하고 외질수록 그 이질감이 커진다고 할 수 있다. 당(唐)의 시인 두보(杜甫) 역시 그의 고향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장강(長江)의 무산(巫山)에서 가을을 맞으면서 쓸쓸한 느낌을 주체할 수 없었다.

◈ 가을의 흥취(秋興) 

玉露凋傷楓樹林(옥로조상풍수림) : 옥 같은 이슬 맞아 단풍나무 숲 시들어 상하고

巫山巫峽氣蕭森(무산무협기소삼) : 무산 무협에 기운이 쓸쓸하네

江間波浪兼天湧(강간파랑겸천용) : 강 사이 물결은 하늘에 닿도록 치솟고

塞上風雲接地陰(새상풍운접지음) : 변방엔 바람과 구름 땅에 접해 음산하네

叢菊兩開他日淚(총국양개타일루) : 한 무더기 국화꽃 두 차례 핀 데 그 옛날 눈물 고였고

孤舟一繫故園心(고주일계고원심) : 외로운 배 묶어둔 데 고향 생각하는 마음 실렸어라

寒衣處處催刀尺(한의처처최도척) : 겨울옷 준비에 곳곳에서 가위와 자를 서둘러 놀리는데

白帝城高急暮砧(백제성고급모침) : 백제성은 높고 저물녘 다듬이질 소리 급하기만 하구나

※ 이슬이 아무리 옥처럼 맑아도, 그것을 맞은 단풍잎이 시들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이슬의 맑은 모습과 단풍잎의 고운 빛은 가을의 보배들이지만,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가을은 더욱 쓸쓸하다.

이처럼 아름답지만 쓸쓸한 가을날에 시인은 오지 중의 오지인 장강(長江) 삼협(三峽), 그 중 하나인 무산(巫山) 아래 무협(巫峽) 근처에 머물고 있다. 그래서 가을의 쓸쓸한 기운이 더욱 물씬한 것이다. 단순히 가을 기운만 물씬한 게 아니라, 여기에 험한 오지 특유의 거친 모습이 겹쳐지면, 쓸쓸함이 아니라 이제는 차라리 두려움이라고 해야 옳다. 바람에 출렁이는 물결이 하늘에 닿는다고 한 것이나, 바람에 떠밀린 구름이 땅과 마주친다는 표현은 과장일지언정 거짓은 아니라는 것은 그곳을 가 본 사람은 다 알 것이다. 그러나 험지(險地)라 해서 험한 모습만 있는 게 아니다. 거기에도 시인의 시심(詩心)을 일깨우는 서정(抒情)의 풍광은 존재하였고, 시인의 눈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시인의 눈에 먼저 띈 것은 한 무더기의 국화꽃이었다.

지난해에도 보았기에 이 국화꽃은 두 번째 보는 것인데, 두 번 다 고향을 떠난 날을 생각하며 눈물을 쏟았다. 두 해 연속해서 눈물 젖은 국화꽃이 된 것이다. 국화꽃에 흘린 눈물을 훔치면서, 시인의 눈은 자연스레 강물 위로 향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거기에 배 한 척이 외롭게 강가에 매여 있는 게 아닌가? 더구나 그 배 안에 실린 것은 다름 아닌 시인의 고향 생각이었으니. 시인의 고향 생각이 어느 정도인지 처절하면서도 낭만적으로 묘사한 솜씨가 참으로 탁월하다. 고향에 대한 상념에서 돌아 온 시인에게 들린 것은 유서 깊은 백제성(白帝城) 근처의 이웃집에서 들리는 겨울 옷 만드는 소리였다. 그런데 이 소리는 고향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아낙의 마음을 담고 있었으니, 시인의 마음은 다시 한 번 고향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타향에서, 그것도 험한 오지의 타향에서 가을을 맞는 것은 참으로 쓸쓸하고, 외로움은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그럴 때면 주변의 국화꽃을 보고, 강가에 매인 배를 보라. 그리고 이웃의 다듬이질 소리를 들어 보라. 그러면 고향 그리움이 달래질지도 모른다. 천삼백년 전 두보(杜甫)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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