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앓다
가을을 앓다
  • 박명애 <수필가>
  • 승인 2013.11.04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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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애 <수필가>

11월은 바람에 민감해지는 시간이다.

슬쩍 돌아나가는 낮은 바람에도 마른 잎 흩어지고, 갈꽃이 출렁댄다. 은어처럼 햇빛에 반짝이는 억새들은 물 마른 잎을 부비며 늦은 가을의 소리를 빚는다.

콘트라베이스를 닮은 고요하고 낮은 소리를 품고 개울가를 건너온 바람은 줄을 튕기듯 도심을 지나며 속도가 빨라지고, 공원의 은행나무를 흔들고 목덜미를 스쳐갈 즈음이면 절정에 다다른 듯 마음의 촉수를 건드린다. 꽁꽁 감춰 놓았던 감정들이 출렁대기 시작한다. 덕분에 며칠을 앓았다.

일주일 고요하게 누워있는 시간. 집안은 적막하고 단풍든 마음을 어쩌지 못해 콩 튀듯 여행을 떠난 지인들이 담아 보내는 메시지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은행잎 지는 아름다운 호숫가, 알록달록한 낙엽들이 물길 따라 흐르는 계곡, 햇볕을 쬐러 나온 자그마한 청개구리, 그리고 열매들. 가을이면 늘 만나는 풍경인데도 새롭고 아름다웠다. 살아있음으로 만나지는 모든 인연들에 감사했다.

잊을 만하면 한 번 씩 앓아눕는 일이 고통스럽긴 하지만 한편으론 쉼표이기도 하다. 놓을 수 없을 것 같던 일도, 책도, 음악도 그리고 욕심도 내 의사와 관계없이 손바닥을 활짝 펴 내려놓게 되는 시간. 감정의 동요 없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마주할 수 있는 시간, 보이지 않던 마음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시간이기도 하다. 병의 근원을 찾아 내 삶을 다시 조율해보는 기회라고 생각하면 가을에 병을 앓는 것도 나쁘진 않다.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면 잎을 떨굴수록 당당해지는 나무들의 속살이 보인다. 나무는 계절 따라 잎을 피우고 열매를 키우고 때가 되면 또 놓을 뿐인데 정작 변화의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호들갑을 떨며 병을 앓는 건 나다. 친구들이 ‘왜?’냐고 물으면 ‘가을 타나봐’라고 핑계를 대지만 그리 우아한 병이 아님은 나 자신만 아는 일이다.

몸이 조금 가벼워질 무렵 전화 한통이 왔다. 둘째 시누이다. 총각무 뽑았다는 전갈. 순간 바람에 나뭇잎 구르듯 느슨해진 몸을 세웠다. 나무처럼 내게도 일 년을 갈무리해야 하는 시간이 지나는 중임을 잊고 있었다. 다 다듬어 주신 덕에 일은 반이 줄었지만 이미 저하된 체력으론 감당하기 고단한 일이다. 절이고 씻고 양념을 만들고 버무리느라 하루가 저물었다. 어느 종가 집 김치 담그는 법을 컨닝 해 올해 총각무 김치엔 메주콩을 삶아 곱게 간 콩물도 넣었다. 맛이 어떨지 기대감으로 설레는 노동의 시간이 행복했다. 고들빼기 김치까지 담그고 나니 한 밤중이다. 옛 사람들이 곳간에 쌀 한 섬 들여놓은 기분이 이러했을까,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겁고 고단했지만 마음은 안도감마저 들며 생기가 돌았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물러지고 느슨해진 몸과 마음을 줄 세우고 이젠 내 삶의 한해를 추수해야 할 때.

그래도 문득 그립다. 낙엽 밟는 소리가 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던 그 가을날의 기억이.

이번 주말엔 그리 가을의 소리를 즐기러 늦은 여행을 떠나봐야겠다. 가을에 앓는 병이 아닌 나무처럼 단단하고 튼실한 내면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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