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사일언(三思一言)
삼사일언(三思一言)
  • 강희진 <수필가>
  • 승인 2013.10.07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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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강희진 <수필가>

요즘 카카오톡으로 아침을 열어주는 회원이 한분 계신다.

‘카톡카톡카톡’하고 울리는 그 소리에 또 그 분이구나 오늘은 무슨 말을 전했을까 하는 생각으로 핸드폰을 집어 든다.

좋은 말들이 넘치는 세상이라 어지간한 글에는 감동이 없다. 나 또한 가끔은 귀찮지만 그 분의 성의를 생각해 답장을 쓰려고 읽어 내려가곤 한다.

그런데 오늘 아침 보낸‘삼사일언(三思一言)’이란 제목의 글은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말하기 전에 세 번을 생각하고 말하라는 평범한 이 말이 오늘 아침 유독 마음을 끄는 것은 말로 인한 고통을 받은 며칠 전의 일 때문이다.

참 좋고 편안한 사람이었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하면서 무엇을 물으면 참 솔직하게 대답을 했다.

그러고는 잊어 버렸는데 한 번은 아는 분이 만나자며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전하는 말을 들으니 이미 내 말이 발이 달려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에 묻는 거라고 하면서 꺼내 놓은 얘기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고개를 들 수 없을 만치 민망한 내용이었으나 결국 모두 다 내가 한 말이었다.

다만 그 얘기를 새로 각색과 윤색을 하고 뚝 떼어다가 다른 상황과 정황에 붙여서 전해진 것인데 내용이 완전 달라졌다는 게 문제다. 그것도 한 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되풀이된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전율이 일었다.

어쩌면 이럴 수가 있나 싶어 머리가 복잡해졌다.

매스컴에서 언론중재위원회에 가장 많이 제소된 것 중 하나가 앞 뒤 정황 뚝 잘라내고 그 말만 녹음을 해 뒀다가 엉뚱한 상황에 붙여 내보낸 것이라고 읽은 적이 있다. 가령 이런 상황에서는 아주 건실하고 유익한 내용이 어떤 상황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전달된다고 하듯 내 경우가 꼭 그랬다.

소심한 나는 밤새 앓았지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병이 날 것만 같았다. 속 시원히 따질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일단은 내 말에 상처 받은 분을 찾아가 정중히 사과하고 그 말을 하게 된 앞 뒤 상황을 설명해서 다행히 오해는 풀렸지만 개운하지 않았다. 결론은 이런 사람과는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담에 보면 ‘말이 말을 만든다’ 혹은 ‘말에는 발이 달려 있다’ 라고 했는데 평범하고 당연한 진리를 잠깐 잊고 살아가는 바람에 화가 난 듯하다.

너무나 믿었던 사람인데 ‘물은 건너봐야 하고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 더니 성인군자도 아니고 가끔은 수다도 떨고 가끔 뒷담화도 하면서 그리 살 수도 없는 내가 참 헛되게 살았구나, 이 나이에 사람 보는 눈이 그것 밖에 안 됐나 하는 자괴감이 밀려 왔다.

그런 터에 오늘아침 카톡에 올라온 얘기가 가슴 절절히 다가온 것이다. ‘말이 많으면 허물이 많다. 돈을 아끼면 부자가 되고 말을 아끼면 성자가 된다. 입을 떠난 말이 어떻게 돌아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 맞는 말이다.

아마 살아오면서 수 십 번은 더 들어 본 글귀다.

이 일을 계기로 앞으로 나는 반드시 하나는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말 잘하기 기법은 2:8이라 한다. 20%만 말하고 80%는 경청하는 것이라 했다. 그 20%의 말도 삼사일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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