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
귀향
  • 박명애 <수필가>
  • 승인 2013.09.05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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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애 <수필가>

바람이 분다. 풀 먹인 무명 이불처럼 산뜻하고 까슬하다. 눈길 닿는 곳마다 폭염을 이겨낸 생명들이 속살을 불리느라 분주한 시간, 아직 따가운 한낮의 햇살이 은혜롭기만 하다. 풍요로운 숨소리 가득한 가운데 혼자 하릴없이 허해지는 마음. 구월엔 무더위보다 견디기 힘든 바람이 가슴으로 분다.

그래서 흔들리는 마음으로 가위질을 한다. 베란다 화초들을 둘러보고 마른 잎을 가려내 뜨거웠던 여름을 잘라낸다. 간신히 목숨 줄을 이어온 구절초는 고사 직전이다. 마른줄기 끝 새순만 꽃처럼 남았다. 주인이 냉방기를 틀어댈 때마다 볕들고 바람 돌아 나가던 산비탈 제집이 그리워 몸살을 앓았으려니. 미안함에 정성들여 마른 이파리들을 떼어낸다. 그래도 줄기 끝 새순에서 꽃이 피기를 희망한다. 희망이란 욕망에 대한 그리움이라 했던가.

책상위에는 아직 정리하지 못한 여름휴가의 흔적들이 흐트러져 있다. 뒤죽박죽 섞여 있는 관람료와 입장권 식당 영수증들. 안내 팜플릿. 떠나기 전 끄적인 기형도의 문장들.  

사실 이번 휴가의 목적은 있다. 그것을 나는 편의상 ‘희망’이라고 부를 것이다. 희망이란 말 그대로 욕망에 대한 그리움이 아닌가. 나는 모든 것이 권태롭다 (중략) 어쨌든 희망을 위하여 나는 대구행 첫 차표를 끊은 것이다.

-기형도. 짧은 여행의 기록 1-3

<희망에 지칠 때까지 중에서>-

몸도 마음도 지쳐가던 팔월의 끝자락. 시인처럼 희망을 찾아 기꺼이 짐을 쌌다. 햄스터처럼 시간을 돌리는 틈새로 끼어드는 욕망과 고민들. 관계로 얹힌 삶의 무게들로부터 탈출이었다.

여행 중 경주가면 꼭 봐야한다는 야경을 보기위해 저녁 느지막이 들어섰던 임해전지는 입구부터 사람과 차가 뒤엉켜 복잡했다.

호기심 반 기대 반 들어선 신라의 옛 별궁터는 연못에 비친 황홀하고 신비로운 반영으로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작은 바위에 걸터앉아 달빛을 즐기고픈 마음과 달리 사람과 소음에 떠밀려 사진 몇 장 찍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결국 달이 비치는 연못이라는 옛 이름 월지에 담긴 속살은 만져보지도 못하고 물위에 비친 환영만 본 셈. 여행지에서도 허허로웠다.

플래시를 터뜨리다 떠나는 사람들. 나에게 그들에게 여행은 어떤 의미일까. 첫 여행지 통도사에서 메모했던 ‘일념의 마음이 그대로 이것이거늘/ 어느 곳에서 따로 찾으려 하는가’ 방장 원명스님의 선시 한 구절이 7번 국도를 더듬어 올라가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몸살처럼 떠나고 싶어 했지만 결국 닿고 싶은 곳은 떠나온 그 자리였을까? 하늘거리는 마타리꽃이 푸른 하늘만큼이나 맑고 청초했다.

그리 몸살을 앓으며 가을은 오고 마음은 또 떠나지만 나는 안다. 내 자리에서 모든 답을 찾아야한다는 걸. 이제 곧 삶을 잉태한 근원으로 귀향하는 인파로 또 몸살을 앓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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