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시간을 그리다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
  • 이헌경 <음성대소초 사서교사>
  • 승인 2013.09.05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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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가 권하는 행복한 책읽기
이헌경 <음성대소초 사서교사>

한바탕 쏟아진 비가 여름을 몰아내고 가을을 데리고 왔다. 이제 곧 간송 미술관에서 가을 전시회가 열릴 것이고 수연산방의 진한 대추차의 따뜻함이 입 안 가득 진한 향기로 기운을 채워주면 길상사를 찾아 단풍을 만끽할 수 있다. 가을이라 여행이 더 그립고, 걷는 발걸음이 더 즐거워진다.

오랜시간 동안 한나라의 수도였던 서울. 한강을 중심으로 많은 문화를 꽃피운 만큼 사계절 내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 사람들 속에서 서울의 골목골목을 펜으로 스케치북에 옮겨 담는 이가 있다. 그림도 좋고 여행도 좋은 그는 평생 길 위에서 펜을 부여잡은 채 스케치북에 머리를 파묻고 쓰러지고자 한다.

도서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이장희·문학동네)는 ‘풍경과 함께한 스케치 여행’이라는 소제목이 알려주듯 분명히 여행서인데 읽다 보면 문뜩 역사서인가라는 착각이 든다. 서울 곳곳에 자리한 건물과 나무와 표지석에 담긴 이야기가 그의 스케치와 함께 간략하면서도 부족함 없이 전달된다.

그는 가장 먼저 광화문을 그렸다. 서울 하면 먼저 떠오르는 곳. 그가 말한 것처럼 나 역시 광화문이다. 폭 100여미터 왕복 16차로 넓은 세종로를 자동차들 사이로 당당히 걷는 걸음 끝에 자리한 광화문. 그 안에 조선의 궁이 있고, 대한민국의 정부가 있다. 그래서일까. 나 역시 광화문이 과거와 현재를 잇는 신비의 문이자 한국의 든든한 대문으로 느껴진다.

서울 도처에는 수많은 표지석이 산재해 있다고 한다. 알리고는 싶은데 복원할 돈도 노력도 부족해 결국 간단하게 남겨둔 것이 표지석이다. 기준 없이 중구난방으로 포진해 있는 표지석을 보고 서울을 거대한 존재감의 무덤이라 말한 그의 말이 가슴 아프다.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이 부수고 고치고 새로 지을까. 길을 걷다 보면 건물 측면에서 멋없이 펄럭이는 커다란 현수막과 제각각의 화려한 조명의 간판들이 참 미워 보인다. 자갈 도로가 차도로는 부적합하지만 과속을 방지하고 물 빠짐이 좋고 열섬현상에 효과가 있어 그대로 유지하는 유럽처럼 경주랑 서울만큼은 우리 역사의 살아있는 공간으로 남겨둘 수는 없는지 아쉽기만 하다.

광화문, 명동, 종로, 혜화동과 인사동처럼 타지에 사는 나도 몇번이나 찾은 동네가 있지만 아직 한번도 가보지 못한 동네도 많이 있다. 교과서에서 본 것 같은 우정총국, 이름마저 생소한 경교장, 딜쿠샤와 환구단. 책으로 이렇게 만났으니 언젠가는 내 발로 찾는 날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이 한권의 책에 서울이 다 담겨져 있지는 않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서울이 담겨 있지도 않다. 사람마다 제 각기 다른 얼굴의 서울을 느끼고 만나고 있으니 말이다. 서울을 더 잘 알고 싶어서 스케치로 담았다는 그의 말처럼 같은 곳이라 해도 자동차를 타고 지날 때 기분과 자전거를 타고 지날 때의 기분, 걸을 때의 기분과 멈춰 서서 느끼는 기분은 같을 수 없다. 더불어 멈춰 서 시간의 흐름까지 느낀다면 더욱 느낌은 다양해진다.

공원 벤치에 앉아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때로는 커피숍 창가에 앉아 길 가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살펴보자. 그 풍경 속에는 내가 아는 역사와 지금이 담겨있지만 십년 뒤 백년 뒤의 모습은 없다. 십년 뒤, 이십년 뒤, 오십년 뒤 시간이 허락하는 한 같은 곳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자. 그리고 그 시간을 느끼자.

가을이 오기는 왔나 보다. 덕수궁에 깃든 고종 황제의 처절한 몸부림이 떠올라 괜히 눈물이 핑 돈다. 지금 한창 진행되고 있는 궁궐의 복원공사와 마찬가지로 궁궐의 명칭도 경운궁으로 돌아오면 좋겠다. 이번 가을 가장 먼저 경운궁을 찾아야겠다. 그리고 정관헌에 들려 고종황제의 커피향기를 맡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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