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기억의 한 페이지에 남을
마지막 기억의 한 페이지에 남을
  • 강희진 <수필가>
  • 승인 2013.06.27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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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강희진 <수필가>

지난 주 노인복지학회 세미나에 다녀왔다. 노인 복지의 문제점과 향후 방향에 대한 발표를 들었다. 발표자와 토론자의 노인복지에 대한 열띤 논쟁을 들으면서 노인문제의 심각성을 다시금 생각했다.

우리나라는 이미 2000년에 65세 노인인구 비율이 7%를 넘어서면서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다. 2018년이면 노인인구 비율이 14%의 고령사회로, 2026년이면 노인 인구 비율이 20%를 넘는 초고령 사회로 접어들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이번 학회에서 마지막 발표자는 ‘민요중심 음악치료가 치매노인의 인지 기능에 미치는 효과’를 말한 양산종합사회복지관의 음악치료사였다. 음악치료는 음악을 듣거나 스스로 연주하고 부르기도 하는데,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어 거부감이 적고 환자를 치료하는 데 적격이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최근에는 아동에서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형태로 접목시켜 치료에 활용한단다.

발표자의 말에 의하면 알츠하이머형 치매노인의 음악치료에 민요를 사용했는데 인지 기능을 향상시킨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발표 내용 중 87세에서 94세 노인들이 대상이었는데 동요나 트로트보다는 민요가 특별히 빠른 반응을 보였다고 했다. 민요 중에 늴리리야를 개사해서 부르게 했는데, 늴리리야라는 소절에서 대신 보고 싶다~~보고 싶다~~ 그 뒤에 누가 보고 싶은가 라고 환자 스스로 붙여야 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대부분의 노인들이 보고 싶다 보고 싶다~~우리 엄마가 보고 싶다 라고 했다지 않는가.

환자들의 평균연령은 80~90대로 인지기능이 떨어져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뇌 속에서도 ‘엄마’는 살아남아 있다는 것이 눈물겨웠다. 세상 기억의 페이지에 가장 오래도록 남아 있는 게 바로 엄마라는 단어였을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우리 뇌의 기억 저장 창고에 엄마가 있었다면 벌써 잊어버렸을 텐데 우리 가슴에 남아 이따금 생각이 나면서 마음을 촉촉이 적시며 살아왔기에 가능한 일을 아니었을까

나도 엄마가 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엄마가 된 지 20여년이 넘었고 나를 엄마라고 부르는 애들도 몇 해 안 있어 엄마가 될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내 앞에서 예쁜 짓을 할 때 특히 엄마가 보고 싶다. 이유를 생각하다가 70먹은 아들이 90노모 앞에서 색동저고리를 입고 재롱을 부렸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노래자는 옛날 중국 초나라에 살았던 인물로서 24효자 중의 한 사람으로 노모의 생신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나 또한 이제는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친정엄마 앞에서 응석을 부리고 싶을 때 특히 보고 싶었던 것 같아 마음이 허허롭다.

기억상실증 환자에게도 뜬금없이 생각나게 될 단어, 아니 좀 더 살면 고손자까지 보게 될 파파 할머니에게도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존재다. 처음 엄마라는 말을 배우면서 세상을 열었던 우리가 이제는 그로써 마지막 기억의 페이지를 장식할 테니, 우리 기억의 창고에서 모두 다 빠져나간 뒤에도 마지막 하나 남은 엄마라는 기억은 텅 빈 공간을 끝까지 채워주는 셈이다.

‘엄마’라는 말 한 마디에는 그렇게 삶의 온갖 애환이 서려 있다. 생각만 해도 기쁨이 되고 눈물을 자아낸다. 태어나서 가장 먼저 익힌 단어가 엄마라는 것도 애틋한 일이거니와 고령화도 모자라 초고령화에 접어드는 시대의 사람들까지 가장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테니 그보다 친근한 말이 또 있을까.

세상 어떤 망각의 지우개로도 지우지 못할 건 곧 ‘엄마였다’고 되뇌는 마음이 불현듯 따사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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