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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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훈일 <문의성당 요한 주임 신부>
  • 승인 2013.06.03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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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의 목소리
김훈일 <문의성당 요한 주임 신부>

미국인들에게 9.11 테러는 아주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그런데 9.11 테러의 아픔이 가시기도 전에 미국 사회를 강타한 사건이 있었으니 ‘엔론사’의 파산 스캔들이다. 엔론사는 통신, 천연 가스, 전기, 제지, 플라스틱, 석유 화학, 철강, 심지어 기후 리스크 관리 같은 분야에까지 손을 댄 에너지 대기업이었다.

유명 경제 잡지인 포춘(Fortune)은 수년간 미국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이라고 극찬했고, 2000년에는 일하기 좋은 100대 회사에 꼽히기도 했다. 그러나 엔론사의 자산과 이익 수치는 대부분 가짜였고, 어떤 경우에는 엄청나게 부풀려졌으며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날조인 것도 있었다. 사회적으로 큰 존경을 받던 기업이 사실은 교묘한 회계 부정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엔론사는 기업의 탐욕과 부패, 그리고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과 동의어가 되었다.

엔론사가 파산신청을 한 이후에도 월드컴, 타이코인터내셔널, 글로벌크로싱, 아델피아 등 대기업의 잇단 회계부정 스캔들이 계속해서 터졌고 급기야 미국 정부는 회계감독위원회를 신설, 기업 규제에 나섰으며 기업의 회계부정을 막기 위해 2002년 7월 기업회계개혁법(사베인스-옥슬리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기업경영진이 기업회계장부의 정확성을 보증하고 잘못이 있으면 처벌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렇게 기업회계에 대한 각국 정부의 규제가 강화되자 조세피난처가 더 각광을 받게 되었다. 그러한 조세피난처 중에 하나가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이다.

최근 인터넷언론매체 뉴스타파는 한국인 245명이 조세피난처인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실명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영국에 본부를 둔 조세정의네트워크(TJN)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2012년 7월 기준으로 한국 기업과 자산가들이 조세피난처로 이전한 자산 누적액은 약 7790억달러(대략 800조원)이다. 중국(1조1890억달러), 러시아(7980억 달러)에 이어 세계 3위 수준이다. 조세피난처로 자금이 이전되는 징후는 국내에서도 감지되고 있다. 관세청 분석에 의하면 2010년 한 해에 우리나라와 조세피난처 국가 사이의 외환 거래는 2552억달러이고 실거래 무역 규모는 1382억달러였다. 차액 1170억달러(약 135조원)는 조세피난처에 투자되거나 해외 도피 혐의가 있는 자금이다. 이를 감안할 때 그동안 우리나라 부자들이 조세피난처에 이전한 자금이 약 800조원에 달한다는 조세정의네트워크의 주장을 무시할 수 없다.

이렇게 기업 경영진들과 자산가들이 정당한 기업 활동이 아닌 서류상 기업을 만들어 돈을 빼돌리는 이유는 비자금 조성, 상속, 횡령 등이 목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탈법의 최종 목적은 조세포탈이다. 즉 세금을 내지 않고 자신의 재산을 지키거나 더 불리기 위해서이다. 탈세만 할 수 있다면 주식이나 채권, 은행이자보다 더 많은 돈을 버는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당시부터 지하경제의 양성화를 이야기 한 것은 우리나라의 탈세 규모가 매우 방대하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조세정의가 바로세워지지 않으면 복지국가의 실현도 자국국방과 국가안보의 확립도 어렵다. 국가복지 논쟁의 핵심도 결국은 한정된 예산 때문에 발생된다. 국가 재정만 여유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복지정책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 쓰여져야 할 세금이 여기저기서 새고 있다. 좀 더 철저히 조세제도를 확립하는 일이 시급하다. 특히 거대 기업들과 법인 및 사회지도층의 탈세에 대해서는 철저한 징수와 처벌이 필요한 시점이다. 또한 모든 국민이 국가와 지역공동체를 위해서 기꺼이 세금을 납부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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