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녀의 역학(力學)
모녀의 역학(力學)
  • 이은옥 <방송작가>
  • 승인 2013.05.30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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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은옥 <방송작가>

성인이 되자마자 독립한 내게 ‘엄마’란 존재는 고단한 자의 도착지 같은 곳이었다.

사는 것의 스산함이 찬바람에 묻어날 때, 도시에서의 생존이 가늠할 수 없는 첩첩한 나락처럼 보일 때, 무명에 휩싸인 세상에서 바라 볼 유일한 불빛처럼 보였다.

연전에 아버지를 여읜 나는 형제들 중 유일한 독신으로 엄마와 살림을 합쳤다.

배우자를 떠나보낸 엄마는 ‘엄마’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노쇠한 모습이었다. 합가한 첫날 그녀를 보며 혼자 되뇌었다. 열심히, 정성스럽고도 충실하게 ‘노모’를 모시리라.

하지만 코믹한 가족영화의 반전처럼, 팔순을 바라보는 ‘노모’는 온후하고 품 넓은 모성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사건건 내 일거수일투족에 사감의 눈으로 관여했다.

설거지거리를 미루면 곧바로 지청구가 날아들었고, 밤에 불 켜두는 시간이 길다 싶으면 어김없이 전기세 걱정을 했다. 냉장고에 오래 머무른 식품은 일장 훈계와 동의어였다.

머지않아 나는 깨달았다. 20여년이 넘는 오랜 지리적 별거 동안, ‘엄마’는 내 의식 안에서 이상화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직도 엄마의 권력을 가진 생활인이었다.

이런이런! 지고한 봉양으로 노모를 모시고, 노모는 자애로운 눈길과 전폭적 신뢰를 보내는 설정은 어디로 간 것인가

아, 나는 다시 독립을 갈구하고 있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라이프스타일을 회복해야 한다고 압박 받는 자의 울컥함까지 느끼며 그렇게 결정을 내리던 즈음, 엄마의 한마디가 들려왔다.

“이런, 헛똑똑이. 엄마 없어봐라. 네가 어디 가서 제 구실이나 하나….”

기시감이 느껴졌다.

예민하고 까탈진 여학생 시절, 설전을 벌이고 부아를 내고 문을 쾅 닫아걸고 그런 문 밖에서 들려오던 똑같은 대사.

세상의 온갖 유행이 골백번 바뀔 세월을 건너왔는데, 그녀와 나의 역학 관계는 바뀌지 않은 것이다.

생각해 보았다.

그때 엄마와 대치하며 나는 불행했나? 천만에. 그럼 지금은?

잠자다 깬 새벽녘, 살그머니 그녀의 방으로 가서 나직한 숨소리를 듣는다. 안심이다, 그녀가 있어서. 꼬장꼬장한 모습으로 거기 있어줘서. 그녀의 자기중심에 나는 안심한다. 그녀는 ‘노모’가 아니라‘엄마’인 것이다.

어린 시절 살폿한 낮잠에서 깨어날 때 갓 생성된 의식사이로 들려오던 소리들. 사각거리는 치마단 소리, 나직한 도마소리, 수돗가에서 빨래 헹구는 소리…. 거기에 언제나 엄마가 있어 안도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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