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뜨는 날
장 뜨는 날
  • 이창옥 <수필가>
  • 승인 2013.04.29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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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창옥 <수필가>

아침부터 분주했다. 된장 담을 항아리를 씻어 햇빛에 말리고 간장을 옮겨 담을 단지도 금이 갔는지 꼼꼼히 확인까지 하고 난후 옥상으로 올려놓았다. 지금까지 장을 한 번도 담가보지 않았다. 언젠가는 꼭 내손으로 담가 먹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자신이 없다는 이유로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나이 들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줄 알았다.

새해가 되자 친정어머니가 메주 넉 장을 주시면서 장을 직접 담가보라 했다. 작년에 고추장을 처음 담가본 것 치고는 꽤 맛나게 잘 했으니 장도 충분이 잘할 수 있다며 방법을 알려 주셨다. 올해는 3월 5일이 말날이라 장 담그기 좋은 길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전화로 물어가며 담가놓은 장이다.

오늘은 장 뜨면 좋은 날이란다. 지난번 친정에 다니러 갔을 때 음력 삼월이전에 장을 떠야 좋다며 달력을 보며 손수 정해주신 날이다. 간장과 메주를 분리해서 메주로는 된장을 만들고 간장은 잘 갈무리를 해 놓아야 한다. 먼저 간장에서 메주를 건져 곱게 으깨고 치대놓았다. 그리고 미리 보리쌀을 불려 푹 삶아 놓은 것과 고추씨 가루를 잘 섞어 으깨놓은 된장과 버무렸다. 항아리에 꼭꼭 눌러 담아놓고 보니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부자인 것만 같다. 나란히 있는 여러 개의 항아리들을 보고 있으려니 절로 입 꼬리가 올라간다. 괜스레 흐뭇해서 햇살 머금고 있는 간장 항아리에 얼굴을 비춰 보기도 하고 고추장과 된장도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본다. 드디어 나도 내손으로 담근 장으로 식구들 밥상을 차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올해로 내 나이 지천명이다. 반백년을 살아오면서 친정어머니의 흐르듯 가는 나이를 애써 염두에 두지 않으려 했다. 몇 년 전부터였다. 장을 얻으러 친정에 가면 이젠 네가 담가 먹어야지 한생전 어미가 담가 주냐며 걱정을 하시곤 했다. 그럴 때마다 세상에서 엄마표 고추장 된장이 제일 맛있다고 내 것인 양 퍼오기는 했지만 마냥 마음이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어머니가 한생전이라고 말씀하실 때마다 그 어휘가 내포하고 있는 속뜻이 자꾸만 헤아려져 가슴이 먹먹했다.

요즘은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 그래서일까. 돈이면 다 해결할 수 있다고, 뭐 하러 힘들여가며 장을 직접 담가 먹느냐고 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내 사고가 보수적인지 쉽게 수긍이 되지 않았다. 어찌 보면 장맛도 부모가 길들여주고 물려준 무형의 유산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오랜 시간 길들여진 장맛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며칠 동안 맛보지 않으면 그리워지는 것이 어머니의 손맛이 들어간 장인 것이다. 나 역시도 하루 이틀 여행을 다녀오거나 밖에서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은 날이면 된장국을 끓여 속 풀이를 해야만 개운했다. 그리 보면 나도 정말 대단한 유산을 물려받은 게 확실하다.

우리가 자식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유산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헤아려보니 나는 재산이 그리 많은 것도 아니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물려줄 것이 별로 없는 셈이다. 하지만 무형의 유산도 커다란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장독대를 오르내리며 깨닫는다. 오늘 나는 내 딸들에게 정성과 기다림을 배울 수 있는 가치 있는 무형의 유산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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