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팝꽃 피는 언덕
조팝꽃 피는 언덕
  • 이효순 <수필가·청주 덕성유치원장>
  • 승인 2013.04.21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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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이효순 <수필가·청주 덕성유치원장>

봄빛으로 가득한 유치원에 살구꽃 비가 내린다.

흰 눈처럼 바람에 흩날려 아기들의 작은 어깨와 머리에 내려앉는다.

봄바람에 눈처럼 날리는 연분홍 꽃잎을 잡아 보려 뛰어다니지만 바람은 아기들에게 그조차 내어주지 않는다.

봄에만 볼 수 있는 모습이 마음에 빗물처럼 녹아든다. 어느덧 개나리의 꽃물결이 흐려지고, 사무실 창으로 보이는 언덕에 조팝꽃이 하얗게 피었다.

다섯 번의 봄을 이곳에서 맞으며 그 모습을 바라본다.

진입로 공사로 언덕을 다시 만들며 길 가장자리의 조팝나무를 잘라 비탈진 언덕에 심어두었다. 그리고 지난해 흙 미끄럼을 타던 곳에도 몇 포기를 심었다. 이제 막 싹이 나기 시작하는 그곳에 아이들이 가끔 보인다. 방부목 계단이 바로 옆에 있어도 아랑곳없이 이웃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이 미끄럼을 타려고 언덕을 자주 오르내린다. 사무실에서 바라보니 하얀 꽃 핀 조팝나무 사이 두 곳이 훤하게 보인다.

해마다 이맘때면 아이들이 언덕에서 나무 틈새를 비집고 흙 미끄럼을 탄다. 그것도 이른 봄부터 조팝꽃이 한창 필 때이다. 위험하다고 주의를 주어도 막무가내다.

그렇게 재미있는지 책가방을 등에 멘 채 넘어지면서도 계속한다. 포근한 봄 햇볕을 온몸에 받으며 땀으로 촉촉하게 머리가 젖는 것도 모른다. 그것을 바라보며 나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본다.

우리 마을에 안산이 있었다. 동네 옆에 있는 작은 야산이 이었는데 그곳에서도 이때쯤 흙 미끄럼을 탔다.

마을에 놀이터도 없고 학교 끝나면 책가방을 벗어놓고 가는 곳이 바로 황토 흙이 있는 산비탈이다.

옷에 흙이 묻는 것은 뒷전이고 연신 미끄럼을 탔다. 해 질 녘에 겁을 먹고 집에 가면 어머니의 역정에 기가 죽는다. 제일 힘든 사람은 빨래를 해 주시는 어머니다.

지금처럼 세탁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비누칠을 하여 힘껏 방망이로 두드려 빨래하던 때인데 바지 궁둥이에 황토 흙을 잔뜩 묻혀 잘 빨리지도 않게 일거리만 장만해주던 기억이 새롭다.

아이들은 흙 미끄럼을 왜 봄이 오면 타는지 잘 모르겠다.

겨우네 추워 움츠렸던 몸을 자연에게 맡겨보고 싶은 마음에서 일까? 한창 자라나는 아이들이 에너지를 발산하지 못하던 시절이었기에 그럴 수도 있었겠지. 정해진 교실의 공간을 벗어나 다른 사람의 간섭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얼마나 즐거웠을까? 그것도 작은 모험까지 곁들인 놀이가.

그런 것들로 자연을 벗 삼아 살던 시절이 어른들에겐 추억으로 남아 있다.

전해준 사람도 없는데 세월을 넘어 옛 모습들이 아직도 남아있음을 본다. 보이지 않게 우리들의 어릴 때 놀이가 이어지며 삶을 엮어가나 보다.

조팝꽃 피는 언덕에 오르면 시원한 바람과 펼쳐지는 여러 빛깔의 봄을 바라볼 수 있다. 살아가며 가끔은 답답한 마음도 바람결에 날려 보낸다.

신나게 흙 미끄럼타던 아이들도 시간이 흐른 후엔 지난날을 곱게 펼쳐 볼 수 있을지. 이런 생각에 잠겨 하얀 조팝꽃 피는 언덕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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