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호색의 비밀
현호색의 비밀
  • 변정순 <수필가>
  • 승인 2013.04.14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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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변정순 <수필가>

몇 해 전 그 사람과 들꽃에 미쳐 산야를 헤매던 때가 있었습니다. 들꽃공원이라는 사이트를 운영하려니 주말이면 카메라 둘러 메고 계곡이든 골짜기든 발 닿는 곳으로 가 야생화를 만났습니다. 보기 드문 귀한 야생화를 만나면 고 녀석에게 빠져 수 십 번의 셔터를 눌러대기도 했지요.

그날은 운이 좋아서 용산리 골짜기에 들어서는 순간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을 수가 없었습니다. 눈을 들어 바라보는 곳에 연보라색 작은 꽃들이 지천으로 널려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현호색이었습니다. 어디로 옮겨야 밟지 않을까 발을 조심스레 움직이면서 무리지어 피어있는 모습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어디에서 씨가 날라 왔는지 뒤 곁에 한포기와 가까운 들녘에서 몇 포기씩 난 모습은 자주 보았지만 그처럼 많은 개체수가 모여 핀 곳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키가 작아 무릎을 꿇고 렌즈를 돌려야 하는데 무릎 밑에도 꽃이 있으니 엉거주춤한 자세로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여름 장마철에는 물이 흘러내렸을 골짜기인데 어떻게 그 많은 현호색이 자랄 수 있었는지. 

현호색은 우리나라 특산식물이고 흔한 식물이지만 사람들에게 친숙하지는 못합니다. 다른 식물은 봄이나 여름에 꽃을 피워서 가을에 열매를 맺지만 현호색의 한해는 무척 짧습니다. 야생화서적을 들춰보니 이른 봄에 일찍 새싹을 올려 삼월 하순에서 사월 초순 꽃을 피우고 오월이면 열매를 맺습니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잎과 줄기가 땅위에서 스러지고 다음 해 봄까지 땅속에 있는 줄기와 덩이뿌리만 살아있습니다. 이러한 생태 때문에 관심 없는 이는 꽃은 물론 씨앗을 볼 수도 없습니다. 자연히 생소한 식물로 느낄 수밖에 없고 여간 부지런하여서는 현호색을 만날 수 없지요.

요염한 여인의 입술을 닮은 두 장의 꽃잎 속에 또 두 장의 꽃잎이 다소곳이 모여 꽃술처럼 보입니다. 꽃잎은 길게 통처럼 모여 꿀주머니를 만드는데 어떤 이는 이 모습을 보고 멸치를 닮았다고도 합니다. 속명의 Corydalis는 히브리어로 종다리를 의미합니다. 윗부분의 꽃잎이 종다리의 머리 깃처럼 생긴 모습에서 유래되었다는군요.

꽃자루의 끝에는 턱잎을 꽃 하나에 한 장씩 달고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꽃차례 하나에 다섯 개에서 열 개의 꽃이 피는데 하나도 서로 마주보고 피는 것이 없습니다. 무슨 말 못할 사정이 있는지 나란히 앞을 보거나 고개를 서로 돌리고 외면하는 모습입니다. 비밀스런 이야기가 가득담긴 보물주머니 같은 꽃잎이 서로 자기를 예쁘고 요염하게 봐 달라고 투정하는 것 같아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연분홍색, 하늘색을 닮은 보라색, 연보라색, 꽃 색을 몇 가지로 표현하여 보았지만 연하고 부드러운 파스텔 톤의 꽃잎은 말로나 글로는 그 아름다움을 형언 할 수 없습니다.

그냥 오묘한 자연의 색, 현호색의 색이라고 표현할 수밖에요.

뒤뜰 한포기의 연보라 현호색이 유혹하네요. 그 사람과 추억을 함께했던 그곳의 풍경을 들려주고 싶나 봅니다.

아, 꽃말이 비밀이라 구요? 그래도 그곳에 가면 야들야들한 잎과 가냘픈 꽃잎을 가진 현호색이 다가와 종달새처럼 새살거리며 수다를 떨 것 같습니다. 비밀이니 깊게 알려 하지 말고 그냥 예쁘게 봐 달라 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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