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언론 산증인과의 만남
지역언론 산증인과의 만남
  • 김주철 기자
  • 승인 2006.08.15 10: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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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로 역사를 기록하는 원로 사진기자 김운기씨

충청타임즈가 오늘로 창간 1주년을 맞았다.

지난 1년동안 충청타임즈 직원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쓸개즙을 삼기는 정신으로 시대에 걸맞는 개혁언론을 만들겠다며 고군분투해 왔고 시민사회단체및 노동계, 충청타임즈의 정신을 존중하는 독자들과 전 충청일보 출신 선후배들의 많은 도움으로 오늘에 이르게 됐다.

특히 김운기 충청타임즈 편집위원은 충청일보에서 사진기자로 32년을 근무한 대선배인데다 언론사명감에 철저한 진정한 '쟁이'로 후배들의 존경을 받고있는 분인데 창간때부터 충청타임즈에 참여, 시리즈물 '무심천 어제와 오늘''잊혀진 생활도구'등을 집필해 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창간 1주년을 맞아 '사진으로 역사를 기록하는 원로사진기자 김운기 편집위원'을 통해 충청권 언론의 역사와 애환, 앞으로의 기대를 들어본다.<편집자 주>


삶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찰나의 기록'

52년간 쉼 없이 불러온 세상을 향한 希望歌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지난 11일 청주시 흥덕구 사직1동 청주의료원 뒤편에 있는 김운기 편집위원(70)댁을 방문했다. 김 위원댁은 사직동 변전소 위 양지바른 언덕에 2층 단독주택으로 아담한 모습을 하고있어 정감이 갔다.

담장이 없는 김 위원댁 현관벽에는 '김운기사진연구소'라는 작은 아크릴간판이 붙어 있어 누구나 쉽게 이분이 무슨 일을 하는 분인지 짐작 할 수 있다.

김위원댁은 50여년간 사진 일에만 매달려서인지 온통 필름과 인화된 사진, 사진자료집 등으로 가득차 있다. 심지어 암실까지 갖추고 직접 흑백사진을 인화작업까지 하니 작은 사진관이나 다름없다.

-김 위원님 요즘 근황은 어떠신지요.

요즘은 그동안 모아온 자료를 정리하는데 소일하고 있다. 특히 이번 집중호우 때도 느낀 것이지만 농촌지역의 옛모습이 재난과 개발열풍에 휩쓸려 사라지고 있어 안타까워 농촌문화를 기록하고 보존하는데 관심을 가져 이에대한 촬영을 나가고 있다. 이제 나이가 많다보니 무슨 일을 벌려놓기 보다는 마무리 짓는데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각종 자료가 상당히 많네요.

1963년 충청일보 사진기자로 생활한 이래 2004년까지 41년간 사진과 인연을 맺었다고 본다. 원래 성격이 작은 물건 하나도 버리지 않는 '수집'적 성격이어서 그동안 모은 자료가 40만~50만점 되지 않나 싶다. 이것들을 정리하는데만 한 2년 걸릴 것같다.

-언론계와 인연은 어떻게 맺으셨나요.

내가 1937년생인데 일제시대와 6·25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피란살이 하느라 집안이 빈한해 제대로 공부도 못했고, 생활이 곤궁했다. 따라서 가족도 먹여 살려야 했고 또 글공부도 해야겠다고 생각해 16살때인 1952년 충청일보 전신인 국민일보 공무국 문선부에 견습공으로 입사하게 됐다. 사진은 당시 남문로 사옥 바로 앞에 사진관이 있었는데 일이 끝나면 사진관에 들어가 잡일을 거들어 주며 기술을 익혔다. 그후 사진관 주인이 사진관 인수를 제의해 당시 32만원에 인수해 운영을 하다가 집세문제로 다툼을 겪어 서울로 사진관을 옮겨 영업을 하다가 군입대 때문에 접었는데, 군 사진반에서 근무를 했고, 1963년 1월부터 다시 충청일보에 입사, 사진기자로 근무를 하게 됐다. 그러나 그해 12월 체불임금 문제로 회사와 다툼이 있어 퇴사해 출판인쇄소에서 6년반 동안 근무를 하다가 1969년 편집국장이 사진기자 입사를 권유해 다시 충청일보에 입사를 했다. 그것이 내인생을 사진기자로 평생을 일하게 만든 계기다. -언론계 생활을 되짚어 보시면 어떻습니까. 1950년대는 6·25전쟁으로 피란민이 많아 무선통신으로 전해온 전투상황을 백지에 적어 벽보로 붙이면 사람들이 벌떼같이 몰려 들었고, 이튿날 아침 신문사에 신문을 구하겠다고 몰려든 사람들이 줄을 서기도 했다. 53년 휴전이 되고 피란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청주인구가 많이 줄었다. 55년 여름 이승만 대통령의 대(大)자에 잉크 티가 묻어 견(犬)자로 인쇄되는바람에 편집국장과 문선공이 사법당국에 잡혀가 조사와 고문을 당하고 신문이 정간됐던 적이 있다. 3개월후 복간을 했으나 그해 가을 한·일회담 초호활자가 일·한(日·韓)으로 바뀌어 여러사람이 조사를 받고 국민일보는 폐간을 당했다. 추운 겨울 동안 할일 없는 직원들은 빈난로에 둘러앉아 겨울을 보내며 족보같이 귀중히 여겼던 보관지를 불 쏘시개로 태웠던 아픈 기억이 있다. 지역인사들의 빗발치는 탄원으로 56년 도지사를 발행인으로 충북신보가 탄생하고 3개월 동안 발행되다가 당시 재계 4위였던 일신산업대표인 이도영박사에게 양도되어 59년 충청일보로 제호가 바뀌었다. 1963년 복직하여 공무국 문선일과 편집국 사진촬영을 겸하다가 회사의 부정적인 일에 항의하다 쫓겨났다가 69년 사진기자로 재입사, 95년 정년퇴임때까지 25년간 근무한 뒤 96년 충청일보 50년사사 편찬을 위해 편집위원으로 2년간 근무를 했고, 97년 사진편집위원으로 특집취재를 5년간 근무해 총 32년간 근무했다. -애피소드가 많겠어요.
69년 사진기자로 발령을 받을때 일반 취재기자 차장 월급이 7000원인데 나는 9000원을 받았다. 그만큼 예우를 받은 것이다. 조사부자료사진을 확인해보니 자료사진이 전무했다. 한 예로 가을 풍경 사진인 수수이삭이 늘어진 사진 한장을 14회나 사용한 것을 보고 계절사진을 필두로 닥치는 대로 찍어 자료도 확보하고 지면쇄신도 이뤘다. 72년 단양수해시 헬기사고로 죽을 고비를 넘겼고 80년 보은수해등 크고작은 사건사고를 사진으로 남겼다. 소년체전 7연패 현장을 찍었고 86년 국내 최초로 청주대 남기창 교수와 충북도계종주 취재를 했으며 88년 충북대 산악부와 백두대간(강원도 미시령~지리산 천왕봉까지)를 취재보도했다. 89~90년 소백산을 취재 보도한 뒤 책(소백산)까지 만들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있다. 편집위원 재직시 '생명의 꽃 우리씨앗'을 64회, 충북의 저명한 문학인 100명과 연계하여 '충청산하' 100회, 전국의 꽃단지를 찾아 30회를 보도했고 서해 섬 시리즈 등 자연생태 중심의 보도를 집중적으로 했다.

60~70년대 충청일보는 경영이 열악해 광각이나 망원 등은 꿈도 꾸지 못했던 시절이다. 따라서 전국체전등에서 사진을 찍으려면 취재대상자를 앞에 두고 거리를 가깝게 다가갔다가 멀리 가는 등 번잡했다. 그래서 껌을 가지고 다니며 중앙지 기자들에게 주고 렌즈를 빌려 찍기도 하고 자리 싸움때 강짜를 부려보기도 하며 영역을 넓혀갔다. 그렇게 안면을 익힌 사진기자들이 많아 나중에는 스스로 예우를 해주는등 대접을 받기도 했다. 이석훈 전 사장의 장인이 박 대통령의 처남인 육인수의원 이었는데, 서울사무소에 들르면 당시 촌지를 1만원씩 줬던 일화도 있고 박모 부사장이 사진이 나빠 신문인쇄가 좋지 않다고 해 동판으로 6장을 밀어 보여줘 윤전기가 나쁜 것을 입증하고 이로인해 새카메라를 샀는데 월악산 취재갔다가 동료가 낭떨어지로 떨어지며 내 분신 같던 카메라를 박살을 냈던 일등이 생각난다.

한번은 지금 강서부대옆에서 농사짓는 모습을 찍고 있는데 예비군 10여명이 총을 들고 에워싸고 있어 깜짝 놀랐는데 알고보니 간첩으로 오해를 해 훈련받다가 체포하려고 했다고 한다. 당시 4면 발행이었는데 매일 3~4장의 사진을 게재, 신문사진의 틀을 다졌다.

-언론인 생활중 보람 있던 일은.

1972년 8월 단양수해시 수재민들이 '왜 우리 이야기가 신문에 실리지 않느냐'고 항의하는 것을 전날 발행된 충청일보를 보여주고 점심용 라면 5봉지를 주자 항의하던 사람이 '고맙다'며 끌어안고 울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헬기를 타고 취재를 하다가 헬기가 고압선에 걸려 꼬리날개가 부러져 추락해 죽다가 살아난 일이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제천을 거쳐 익일 새벽 4시에 청주에 도착, 사진 80장을 만들어 신문에 싣고 청주문화원에서 최초로 '보도사진전'을 열어 수재의연금을 모아 전달했다. 충청일보를 본 박정희 대통령이 미군 시누크헬기에 구호품을 잔뜩 싣고 이재민들에게 공수해 준 일, 박 대통령이 직접 단양을 방문했던 일등이 생각난다. 또 소년체전 7연패의 위업을 달성한 데는 언론의 역할이 컸다. 강화훈련 모습을 시리즈로 보도해 선수와 체육인들의 사기를 높여줬고 경기때 오심을 못하도록 지켜줘 종합우승을 하게 만든일, 1980년대 보은 수해, 1973년 영동역 유조열차 전복사고로 한동네가 불바다가 돼 37명이 소사한 사건, 91년 대마도에 조선통신사비를 건립한 일, 90년 북경아시안게임을 27일간 취재한 일등이 보람된 일로 생각난다.

가장 기억에 남는 특종은 37년만에 미호천변에 재두루미가 나타난 것을 겨울에 포복을 해서 찍었는데 전국 특종으로 원병오 박사가 현장에 찾아오고 난리가 났었다. 또 89~90년까지 2년여 동안 소백산을 종주, 책을 낸 일이다.
   

-그럼 아쉬운 일은 무엇인가요.

한수이남에서 가장 오래된 충청일보가 경영을 잘했으면 전국에서도 우수한 신문으로 남았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개인적으로는 어려운 시절 가족들을 먹여살렸고, 자녀들을 공부시켜 훌륭한 사회인으로 만들었고, 사진기자로 이름을 날렸으니 인간승리다. 다만 초창기 3년 동안 단 하루도 쉬지않고 취재를 해 연로하신 부모님과 부인, 그리고 자녀들을 돌보지 못했던 시절이 미안하고 아쉽다. 그래도 가족들 생활하고 아이들 잘커서(큰딸이 대학 예비고사시험에서 충북도내 1위를 차지, 당시 화제가 됐고 서울대와 미 일리노이주립대학을 졸업,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 현재 조세연구소에서 근무중이라고 한다)보람으로 생각한다.

-지난 2004년9월 충청일보노사분규와 지난해 8월15일 충청타임즈가 창간됐을 때 감회가 남달랐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내가 1952년 4월 16살의 나이로 당시 국민일보 공무국 견습사원으로 입사한 이래 2004년 봄까지 52년간 인연을 맺고 일생을 보냈는데 사주나 경영자의 비뚤어진 생각으로 회사가 문을 닫게돼 엄청 속이 상했다 .사옥 앞에서 사원들이 농성하는 모습을 보고 눈물이 났었다. 어쨌든 충청일보에 근무했던 후배들이 새롭게 신문을 창간, 충청일보의 언론정신을 이어간다고 하니 감회가 새롭고 기쁘게 생각한다. 그래서 조그만 힘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무심천어제와 오늘'이나 '잊혀진 생활도구' 등을 게재하게 된 것이다.

-충청타임즈에 바람이 있다면.

그동안 허리끈 졸라매고 열심히 했는데 사명감 가지고 더열심히 노력해 충청일보의 영광을 되찾기 바란다. 사실 국민일보때나 초창기 충청일보때도 지금처럼 고생 많이 했다.

-대학에 사진 강좌를 많이 하셔서 제자들도 많은 것으로 아는데요 .

1994년부터 서원대서 4년 반, 충북대에서 5년 반 했으니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꽤 된다. 사진작가로 등용된 사람이 40명, 일반 취미작가가 200여명 된다.

-앞으로의 계획은.

내 나이 벌써 70세다. 이제 뭔일을 벌리기 보다는 그동안 모아온 자료들을 정리, 공익단체에 기부해 유용하게 활용될 수있도록 마무리 하는 일이라고 본다.아쉬운것이 충청일보 자료를 정리하지 않고 퇴사한 것이다. 사진 한 장 한 장이 내가 보고 정리하지 않으면 그 자료는 쓸모 없는 자료로 사장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늘 건강하시고 사진기자로서, 사진 작가로서도 좋은 작품 많이 만드시고 보람있는 삶을 사시길 후배들이 기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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