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로 역사를 기록하는 원로 사진기자 김운기씨
충청타임즈가 오늘로 창간 1주년을 맞았다.
지난 1년동안 충청타임즈 직원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쓸개즙을 삼기는 정신으로 시대에 걸맞는 개혁언론을 만들겠다며 고군분투해 왔고 시민사회단체및 노동계, 충청타임즈의 정신을 존중하는 독자들과 전 충청일보 출신 선후배들의 많은 도움으로 오늘에 이르게 됐다.
특히 김운기 충청타임즈 편집위원은 충청일보에서 사진기자로 32년을 근무한 대선배인데다 언론사명감에 철저한 진정한 '쟁이'로 후배들의 존경을 받고있는 분인데 창간때부터 충청타임즈에 참여, 시리즈물 '무심천 어제와 오늘''잊혀진 생활도구'등을 집필해 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창간 1주년을 맞아 '사진으로 역사를 기록하는 원로사진기자 김운기 편집위원'을 통해 충청권 언론의 역사와 애환, 앞으로의 기대를 들어본다.<편집자 주>
삶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찰나의 기록'
52년간 쉼 없이 불러온 세상을 향한 希望歌
담장이 없는 김 위원댁 현관벽에는 '김운기사진연구소'라는 작은 아크릴간판이 붙어 있어 누구나 쉽게 이분이 무슨 일을 하는 분인지 짐작 할 수 있다.
김위원댁은 50여년간 사진 일에만 매달려서인지 온통 필름과 인화된 사진, 사진자료집 등으로 가득차 있다. 심지어 암실까지 갖추고 직접 흑백사진을 인화작업까지 하니 작은 사진관이나 다름없다.
-김 위원님 요즘 근황은 어떠신지요.
요즘은 그동안 모아온 자료를 정리하는데 소일하고 있다. 특히 이번 집중호우 때도 느낀 것이지만 농촌지역의 옛모습이 재난과 개발열풍에 휩쓸려 사라지고 있어 안타까워 농촌문화를 기록하고 보존하는데 관심을 가져 이에대한 촬영을 나가고 있다. 이제 나이가 많다보니 무슨 일을 벌려놓기 보다는 마무리 짓는데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각종 자료가 상당히 많네요.
1963년 충청일보 사진기자로 생활한 이래 2004년까지 41년간 사진과 인연을 맺었다고 본다. 원래 성격이 작은 물건 하나도 버리지 않는 '수집'적 성격이어서 그동안 모은 자료가 40만~50만점 되지 않나 싶다. 이것들을 정리하는데만 한 2년 걸릴 것같다.
-언론계와 인연은 어떻게 맺으셨나요.
60~70년대 충청일보는 경영이 열악해 광각이나 망원 등은 꿈도 꾸지 못했던 시절이다. 따라서 전국체전등에서 사진을 찍으려면 취재대상자를 앞에 두고 거리를 가깝게 다가갔다가 멀리 가는 등 번잡했다. 그래서 껌을 가지고 다니며 중앙지 기자들에게 주고 렌즈를 빌려 찍기도 하고 자리 싸움때 강짜를 부려보기도 하며 영역을 넓혀갔다. 그렇게 안면을 익힌 사진기자들이 많아 나중에는 스스로 예우를 해주는등 대접을 받기도 했다. 이석훈 전 사장의 장인이 박 대통령의 처남인 육인수의원 이었는데, 서울사무소에 들르면 당시 촌지를 1만원씩 줬던 일화도 있고 박모 부사장이 사진이 나빠 신문인쇄가 좋지 않다고 해 동판으로 6장을 밀어 보여줘 윤전기가 나쁜 것을 입증하고 이로인해 새카메라를 샀는데 월악산 취재갔다가 동료가 낭떨어지로 떨어지며 내 분신 같던 카메라를 박살을 냈던 일등이 생각난다.
한번은 지금 강서부대옆에서 농사짓는 모습을 찍고 있는데 예비군 10여명이 총을 들고 에워싸고 있어 깜짝 놀랐는데 알고보니 간첩으로 오해를 해 훈련받다가 체포하려고 했다고 한다. 당시 4면 발행이었는데 매일 3~4장의 사진을 게재, 신문사진의 틀을 다졌다.
-언론인 생활중 보람 있던 일은.
1972년 8월 단양수해시 수재민들이 '왜 우리 이야기가 신문에 실리지 않느냐'고 항의하는 것을 전날 발행된 충청일보를 보여주고 점심용 라면 5봉지를 주자 항의하던 사람이 '고맙다'며 끌어안고 울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헬기를 타고 취재를 하다가 헬기가 고압선에 걸려 꼬리날개가 부러져 추락해 죽다가 살아난 일이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제천을 거쳐 익일 새벽 4시에 청주에 도착, 사진 80장을 만들어 신문에 싣고 청주문화원에서 최초로 '보도사진전'을 열어 수재의연금을 모아 전달했다. 충청일보를 본 박정희 대통령이 미군 시누크헬기에 구호품을 잔뜩 싣고 이재민들에게 공수해 준 일, 박 대통령이 직접 단양을 방문했던 일등이 생각난다. 또 소년체전 7연패의 위업을 달성한 데는 언론의 역할이 컸다. 강화훈련 모습을 시리즈로 보도해 선수와 체육인들의 사기를 높여줬고 경기때 오심을 못하도록 지켜줘 종합우승을 하게 만든일, 1980년대 보은 수해, 1973년 영동역 유조열차 전복사고로 한동네가 불바다가 돼 37명이 소사한 사건, 91년 대마도에 조선통신사비를 건립한 일, 90년 북경아시안게임을 27일간 취재한 일등이 보람된 일로 생각난다.
가장 기억에 남는 특종은 37년만에 미호천변에 재두루미가 나타난 것을 겨울에 포복을 해서 찍었는데 전국 특종으로 원병오 박사가 현장에 찾아오고 난리가 났었다. 또 89~90년까지 2년여 동안 소백산을 종주, 책을 낸 일이다.
-그럼 아쉬운 일은 무엇인가요.
한수이남에서 가장 오래된 충청일보가 경영을 잘했으면 전국에서도 우수한 신문으로 남았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개인적으로는 어려운 시절 가족들을 먹여살렸고, 자녀들을 공부시켜 훌륭한 사회인으로 만들었고, 사진기자로 이름을 날렸으니 인간승리다. 다만 초창기 3년 동안 단 하루도 쉬지않고 취재를 해 연로하신 부모님과 부인, 그리고 자녀들을 돌보지 못했던 시절이 미안하고 아쉽다. 그래도 가족들 생활하고 아이들 잘커서(큰딸이 대학 예비고사시험에서 충북도내 1위를 차지, 당시 화제가 됐고 서울대와 미 일리노이주립대학을 졸업,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 현재 조세연구소에서 근무중이라고 한다)보람으로 생각한다.
-지난 2004년9월 충청일보노사분규와 지난해 8월15일 충청타임즈가 창간됐을 때 감회가 남달랐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내가 1952년 4월 16살의 나이로 당시 국민일보 공무국 견습사원으로 입사한 이래 2004년 봄까지 52년간 인연을 맺고 일생을 보냈는데 사주나 경영자의 비뚤어진 생각으로 회사가 문을 닫게돼 엄청 속이 상했다 .사옥 앞에서 사원들이 농성하는 모습을 보고 눈물이 났었다. 어쨌든 충청일보에 근무했던 후배들이 새롭게 신문을 창간, 충청일보의 언론정신을 이어간다고 하니 감회가 새롭고 기쁘게 생각한다. 그래서 조그만 힘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무심천어제와 오늘'이나 '잊혀진 생활도구' 등을 게재하게 된 것이다.
-충청타임즈에 바람이 있다면.
그동안 허리끈 졸라매고 열심히 했는데 사명감 가지고 더열심히 노력해 충청일보의 영광을 되찾기 바란다. 사실 국민일보때나 초창기 충청일보때도 지금처럼 고생 많이 했다.
-대학에 사진 강좌를 많이 하셔서 제자들도 많은 것으로 아는데요 .
1994년부터 서원대서 4년 반, 충북대에서 5년 반 했으니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꽤 된다. 사진작가로 등용된 사람이 40명, 일반 취미작가가 200여명 된다.
-앞으로의 계획은.
내 나이 벌써 70세다. 이제 뭔일을 벌리기 보다는 그동안 모아온 자료들을 정리, 공익단체에 기부해 유용하게 활용될 수있도록 마무리 하는 일이라고 본다.아쉬운것이 충청일보 자료를 정리하지 않고 퇴사한 것이다. 사진 한 장 한 장이 내가 보고 정리하지 않으면 그 자료는 쓸모 없는 자료로 사장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늘 건강하시고 사진기자로서, 사진 작가로서도 좋은 작품 많이 만드시고 보람있는 삶을 사시길 후배들이 기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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