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 생각나는 '이 사람'>꽹과리와 한평생 … '충북 멋·소리' 보존 토대 마련
<명절에 생각나는 '이 사람'>꽹과리와 한평생 … '충북 멋·소리' 보존 토대 마련
  • 연지민 기자
  • 승인 2013.02.07 22: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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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농악 예능보유자 이종환 옹

13살 정식 상쇠 입문 … 90평생 상쇠의 삶

광복후 농악대 활동으로 청주농악 맥 이어

평생 함께했던 꽹과리 버리지 못하고 보관

설날이면 동네마다 풍장 소리로 들썩인다. 동네 청년들로 구성된 풍물패가 집집마다 돌며 액을 없애주고 복을 기원하는 풍물놀이로 신명나게 새해를 열어준다. 풍물패의 우두머리 격인 상쇠는 꽹과리 연주자로 연주와 연기에 있어 가장 뛰어날 뿐만 아니라 놀이판의 총지휘자이다. 가락에도 결이 있고, 그 결이 가야 할 곳을 ‘쇠’가 알고, ‘쇠’를 아는 ‘상쇠’가 있기에 상쇠의 놀림에 따라 풍물굿판도 달라진다.

풍물판의 주인공으로 90평생을 상쇠로 살고 있는 청주농악 예능보유자 이종환 옹에게 설명절의 의미는 남다르다. 쇠를 치기 시작한 뒤로 설날은 물론 우리 가락이 필요한 행사장은 그의 무대나 다름없었다. 역동적이면서 세련된 그의 꽹과리 타법과 가락에 ‘팔랑개비’, ‘물찬 제비 상쇠’라는 별명이 따라 붙을 만큼 날렵했다.

어린 시절, 어깨 너머로 가락을 익혀 열세살에 정식으로 쇠를 잡기 시작한 그는 무엇이든 손에 잡으면 두드리는 습관이 생겼을 정도였다.

일제강점기에 징용으로 군대에 끌려간 때 빼고는 꽹과리를 손에서 놓은 적이 없다는 그는 광복 후 농악대를 만들어 활동한 것이 청주농악의 시작이었다.

1958년 마침내 청주농악대의 상쇠가 되어 지동마을과 청주를 거점으로 활동했고,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해 문화부장관상을 수상하는 등 청주농악의 우수성을 전역에 알렸다.

농사짓다가도 공연이 있다면 열일 제쳐두고 길을 나선 일이지만 돈버는 것과는 인연이 멀다. 돈도 안벌리는 일을 왜 하냐고 묻는 아내에게 “돈이 문제냐 팔도강산 보는 것이 다 얻는 거지”라는 말로 뭉뚱그려 넘어가곤 했다고 한다.

이처럼 남다른 열정으로 지역 전통문화 보존에 힘쓴 결과 ‘청주농악’이 1992년 10월 23일 충북 무형문화재 제1호 지정되었고, 이종환 옹 역시 청주농악예능보유자로 지정받아 충북의 멋과 소리가 보존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혼을 빼놓는 선친의 예인 기질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는 이종환 옹은 풍물가락에 빠져 상쇠의 삶을 산지도 80년이 넘어서고 있다. 하지만 세월은 누구도 비껴갈수 없는 냉엄한 현실이다. ‘물찬 제비 상쇠’로 청주농악의 산증인이었던 그도 2004년부터 찾아온 지병과 노환으로 병마와 씨름 중이다.

작은 체구에 성한 곳 없는 몸이지만 병상에 누웠어도 눈에 밟히는 것은 꽹과리와 쇠의 요란한 울림이다. 녹음된 자신의 연주를 들으며 가락의 그리움을 달래다가도 곧잘 ‘억울하다’고 말한다. 평생 흥을 끼고 살아 원도 한도 없을 법한데, 다시 한번 멋드러지게 꽹과리를 치고 싶은 예술 장인의 근성을 억울함으로 말할 땐 듣는 사람들의 가슴도 먹먹하게 만든다.

상쇠로의 애틋한 마음은 이종환 옹의 손을 거쳐간 꽹과리에서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안방 벽면에는 그가 최근까지 사용했던 꽹과리가 덩그러니 걸린 채 주인을 기다리고 있고, 오랜 동안 그의 손에서 가락을 들려주던 묵은 꽹과리 20여개가 자루에 담겨 주인의 체취를 간직하고 있다.

묵은 꽹과리 중에는 오래 사용하다 깨진 꽹과리도 있고, 소리가 맘에 들지않아 손에서 바로 내려놓은 꽹과리도 있다. 검게 변색된 꽹과리에선 그가 징하게 두드렸을 상쇠 가락이 파동으로 전달돼 온다. 이런 저런 사연으로 이종환 옹과 인연을 맺었던 꽹과리들을 펼쳐놓고 보니, 울퉁불퉁 세월의 각을 품은 꽹과리들도 주인의 손길이 그리운듯 아련하다.

계사년 설날을 맞아 마을마다 액을 쫓고 복을 부르는 신명나는 꽹과리의 울림처럼 이종환 옹의 쾌차를 빌어본다.



◈ '청주농악' 무형문화재 지정 산파역

60년대 '풍년놀이 풍악대' 창설 전국 주목

6·7·30회 민속예술경연대회 장관상 수상

예능보유자 지정 … 청주농악 4세대 양성중

어려서부터 강서 웃다리 농악의 전통을 만든 아버지가 치던 가락을 익힌 이종환씨는 13세(1936년) 때에 정식으로 쇠를 치기 시작했고, 16세(1939년)에는 근방의 신촌리 마을에 들어와 잡희놀이를 하던 송순갑 선생이 이끄는 유랑솟대패를 따라 나서, 공주, 천안, 조치원 등 여러 지역의 장터를 다니면서 무동(새미), 법구, 장고, 쇠가락 등을 배웠다.

광복 후에 이종환씨를 비롯해 강서·신촌·서촌·남촌·내곡·원평·송절·신대·비하리에 거주하는 농악인들이 모여 농악대를 발족시키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청주농악이다.

청주농악의 계보를 따지자면 1세대인 이규응씨와 그로부터 풍물을 배운 제자 김창환, 그리고 현재 청주농악 기능보유자인 3세대 이종환씨로 청주농악의 맥을 살필 수 있다. 특히 이종환씨는 1958년 청주농악대의 상쇠가 되어 지동마을과 청주를 거점으로 활발하게 활동한다. 60년대 초에 유승백, 홍복룡, 김윤수, 김봉희 등과 함께 ‘강서웃다리농악’을 전수하는 「풍년놀이 풍악대」를 창설해 전국대회에 출전해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하는 등 상쇠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또한 제6회(1965), 제7회(1966년), 제30회(1989)에 걸친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여 문화부장관상을 수상하면서 청주농악의 우수성을 우리나라 전역에 알려 충북 농악의 정체성을 견고하게 뿌리내리는데 가교역할을 했다. 이런 노력으로 1992년 10월 23일 마침내 ‘청주농악’은 충북 무형문화재 제1호 지정됐고, 이때 이종환씨는 청주농악 예능보유자로 지정받는다.

이종환씨는 현재 청주시 흥덕구 강서1동에 거주하고 있다. 90고령이어서 현장에서 직접 상쇠를 맡거나 재주놀이를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청주농악 4세대를 양성 중이다.

(조순현 민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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