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에 봄을 묻다
한겨울에 봄을 묻다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3.01.28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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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연일 강추위가 맹위(猛威)를 떨친다. 잦은 폭설에 산이고 들이고 온통 눈을 뒤집어썼다. 도무지 끝이 보이질 않는다. 겨울에 끝이 있기는 한 것일까? 봄은 도대체 언제나 올까? 오기는 오는 것일까? 그러나 절망할 일이 아니다. 세월이 약이라서가 아니다. 혹독한 추위를 무릅쓰고 눈 속에 묻힌 채로 피어난 꽃 한 송이 때문이다. 송(宋)의 시인 왕안석(王安石)은 한 겨울 담장 모퉁이에서 뜻하지 않은 만남을 하고서, 그에게 봄을 물었다

◈ 매화(梅花)

墻角數枝梅(장각수지매) : 담장 모퉁이에 핀 몇 가지 매화꽃이여

凌寒獨自開(능한독자개) :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홀로 피었구나

遙知不是雪(요지불시설) : 먼 곳에서도 눈이 아님을 알겠으니

爲有暗香來(위유암향래) : 그윽한 매화 향기 전해오기 때문이어라

※ 강추위에 문밖출입이 뜸하지 않더라도, 평소 사람 눈이 잘 닿지 않는 곳이 담장 모퉁이다. 버려진 그 곳이 오늘따라 광채가 난다. 뜻하지 않게도 거기에 겨울의 진객(珍客)이 찾아온 것이다. 평소 눈에 띄지도 않던 나뭇가지에 꽃이 매달리고 나서야, 그것이 매화(梅花)인 것을 알았다. 한겨울의 추위도 매화의 핌을 막을 수 없었다.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의지로만 꽃을 피운 것이다. 시인은 능(凌)이라는 한 글자에 매화의 속성을 고스란히 담았다. 능소(凌)니 능운(凌雲)이니 하는 말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능(凌)은 거침없다거나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늘(?)이나 구름(雲)은 사람으로서는 자력으로 도달할 수 없는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한계성을 초월하는 존재가 있다면, 사람들은 이를 경외(敬畏)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한 겨울에는 도저히 꽃이 필 수 없다는 것은 꽃의 한계성이자 사람 인식의 한계성이다. 그러나 마치 하늘을 모르고 구름을 모르고 거침없이 치솟는 능소화(凌花)처럼, 능운지지(凌雲之志)처럼 겨울이 무언지 추위가 무언지 아예 모르고 피는 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매화(梅花)인 것이다. 겨울을 견디는 것이 인동초(忍冬草)라면, 매화는 겨울을 아예 모르는 능한화(凌寒花)일 터이니, 아무래도 인동(忍冬)보다는 능한(凌寒)이 한 수 위 아닌가? 시인의 감탄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겨울을 장식하는 새하얀 눈과의 비교를 통해서 매화(梅花)의 존재를 부각시키고자 한다. 멀리서 보면 매화(梅花)는 눈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 하얗기가 눈 못지않기 때문이다. 겨울의 왕자인 눈의 순백(純白)마저도 아랑곳하지 않는 매화(梅花)의 하얀 자태이니 가히 능설지백(凌雪之白)라 아니 할 수 없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빛깔에서는 눈의 트레이드마크인 순백(純白)에 전혀 뒤지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럼 매화(梅花)와 눈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바로 냄새이다. 눈은 냄새가 없지만, 매화(梅花)는 냄새가 있다. 단지 유무(有無)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냥 냄새가 아니라 향(香)이다. 그냥 향(香)이 아니라 암향(暗香)이다. 냄새에 어두움이 있느냐고 묻는 사람은 운치를 모른다는 비아냥을 들어도 싸다. 빛이 어두우면 눈에 띄지 않듯이, 향기는 어두우면 코가 알아채기 어렵다. 튀는 게 아니라 그만큼 그윽하다는 얘기이다. 자극적인 향기보다 더 멀리 더 오래 가는 암향(暗香)은 누구의 것도 아닌 매화(梅花)만의 것이다.

겨울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장 모퉁이에 성기게 핀 매화(梅花)는 한겨울에 봄을 묻는 사람들에게 봄의 이정표(里程標)가 아니고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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