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권과 법치주의
사면권과 법치주의
  • 김훈일 <문의성당 요한 주임 신부>
  • 승인 2013.01.28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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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의 목소리
김훈일 <문의성당 요한 주임 신부>

법지불행자상정지(法之不行自上征之)‘법이 행하여 지지 않는 이유는 위에서 그것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뜻으로, 솔선수범해 법을 지켜야 할 윗사람들이 법을 어기기 때문에 아랫사람들도 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법치주의를 내세웠던 ‘상앙’의 고사(故事)에서 유래한 말이다.

상앙은 진나라 통일의 기틀을 세운 법가 사상가이자 관료로, BC 361년에 진(秦)나라 효공(孝公: 재위 BC 361~338))에게 발탁되어 토지개혁, 귀족의 세습 특권 폐지 등 많은 개혁을 통해 진나라의 기틀을 세웠다. 특히, 그는 법가 사상가로 엄격한 법집행을 실시한 인물로 유명하다.

전해지는 이야기로 진효공의 태자가 사형 판결을 받은 왕족을 숨겨줬다가 발각된 일이 있었는데 이는 범인과 동죄라고 하는 법에 따라 태자도 요참형(腰斬刑)을 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상앙은 태자를 법에 따라 처벌하려고 했으나 차마 왕위를 계승할 태자를 죽일 수는 없었다. 결국, 상앙은 진왕 효공과 상의하여 태자를 벌하는 대신 측근을 벌하고, 태자의 스승 이마에 먹물로 문신을 새겨 넣었다. 태자라 할지라도 법 앞에 예외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이후 진왕 효공이 사망하고 태자가 혜왕으로 즉위하자 상앙을 잡아들이라고 명한다. 상앙은 체포 직전 도주해 국경 부근에 이르러 여관에 들어가려 했으나 통행증이 없었다. 통행증 제도는 상앙이 만든 것으로 여관에 숙박할 때는 누구든 통행증을 보여주어야 했다.

이에 여관 주인은 ‘통행증이 없는 당신을 재워주면 내 목이 달아난다.’라며 상앙을 내몰았다. 밖으로 나온 상앙은 ‘아, 내가 만든 법에 내가 걸려들었구나!’라고 한탄했다. 결국, 상앙은 자기가 정한 법에 따라 잡히고, 자기가 만든 거열형(車裂刑)으로 사지가 찢겨 죽고 만다.

법치주의는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법이 올바로 서지 않으면 민주주의 질서가 유지될 수 없고 공정한 세상을 만들 수가 없다. 이명박 대통령이 퇴임을 앞두고 형과 최측근을 위한 사면권을 행사하려고 한다. 이것은 국민이 대통령에게 준 사면권의 남발이다. 대통령의 형이고 측근이라면 무슨 죄를 지어도 사면받을 수 있는 세상이라면 더 이상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이미 이명박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에 친·인척과 측근 비리를 없애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한 바가 있다. 그러나 드러난 사실만 보면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도 측근 비리가 많았고 죄질도 나빴다. 아마도 이명박 대통령은 자신의 측근들이 다음 정권에 의해서 처벌받기 전에 면죄부를 주려고 미리 재판과 형을 받게 했나 보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설사 사면권을 행사하지 않더라도 여론을 떠보는 이런 행태 자체가 실망스럽다. 만약 최측근을 위해 사면권을 행사한다면 법 위에 군림하는 권력의 표상을 국민에게 각인시켜 줄 것이다.

대통령조차 법을 무시하는 우리 사회가 걱정이다. 정치인들과 공직자들과 권력자들이 더 법을 지키지 않는데 길거리로 나오는 국민에게 공권력만 행사하려고 한다. 사회지도층이 준법하며 나라를 이끈다면 누가 길거리에 나와 격한 시위를 하겠는가? 흉악범죄인들에 대한 형벌만 강화할 것이 아니라, 이 나라 지도층에 대한 범법 행위에 대한 처벌도 강화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박근혜 정부는 첫 국무총리로 대법관과 헌법재판소 소장을 지낸 인사를 발탁했다. 법치주의에 입각한 공정하고 질서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간절히 바라는 바는 법치가 사회지도층에는 면죄부를 주고 힘없는 서민들에게는 공권력을 행사하는 도구가 아니라 모든 국민이 함께 만들어 가는 질서 있고 정의로운 세상을 위한 수단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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