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모에 그리운 사람
세모에 그리운 사람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3.01.21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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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이중과세(二重過歲) 논란에도 불구하고 음력과 양력으로 해를 보내고 맞이하기 때문에 세모(歲暮)가 두 달 남짓 되기도 한다.

자신의 나이가 많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양력으로 새해가 되었음에도 음력 핑계를 대며 아직 나이를 먹지 않았다고 임시방편의 위안을 갖기도 한다. 양력으로 1월 하순이지만 음력으로는 여전히 세모(歲暮)이다. 해(歲)라는 것은 사람이 정한 세월의 단위에 불과하지만, 한 해가 바뀌는 연말연시(年末年始)에는 유독 세월의 흐름이 눈에 보이는 듯하고, 환승역에서 열차를 갈아타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젊어서는 느끼지 못하던 세월의 무게가 새삼 실감으로 다가오면서, 그 동안 잊고 지냈던 지인(知人)들이 문득 그리워지곤 한다. 조선 초기의 정치가였던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도 세모(歲暮)에 문득 생각나는 벗이 있었다.

◈ 순흥부사좌상부시(順興府使座上賦詩)-정도전(鄭道傳)

路立┌有雪(로장산유설) : 길은 멀고 산에는 눈이 있는데

村暝水生煙(촌명수생연) : 마을은 해 저물어 어둑어둑하고

물에는 안개가 피어나네

乘興尋安道(승흥심안도) : 흥을 타서는 대안도를 찾고

吟詩似浩然(음시사호연) : 시를 읊음에는 마치 맹호연과 같도다

別離三載外(별리삼재외) : 이별한 지 삼 년이 지났는데

談笑一尊前(담소일존전) : 웃고 말하며 한 술병 앞에 앉아있다

此曲難堪聽(차곡난감청) : 이 곡을 차마 듣기 어려우니

蒼茫歲暮天(창망세모천) : 아득하도다, 세밑의 하늘

 

순흥(順興) 땅 부사(府使)가 마련한 연회(宴會)에서 삼봉(三峰)은 그리운 벗을 떠올리고 붓을 들었다. 벗이 기거하는 마을을 찾아갔던 일에 대한 회상으로 시인은 운을 떼었다. 길은 멀기만 한데 주변 산에는 눈이 덮여 있다.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다다른 벗의 마을은 어둑어둑하고 물안개가 자욱하다.

동진(東晋)의 서예가 왕희지(王羲之)의 다섯째 아들 왕휘지(王徽之)는 지금의 소흥(紹興)인 산음(山陰)이라는 곳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큰 눈이 내린 겨울 밤, 잠자리에서 일어나 술 한 잔을 하던 중, 섬계(剡溪)라는 곳에 살고 있는 친구인 대안도(戴安道)가 문득 보고 싶었다. 그 길로 배를 저어 날이 밝을 무렵 친구 집 앞에 당도하였는데, 들어가지 않고 되돌아오고 말았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나는 본디 흥(興)을 타고 갔다가, 흥(興)이 없어져 돌아온 것이니, 어찌 꼭 대안도(戴安道)를 만나야만 한단 말이오?”라고 대답하였다.

세속을 초탈한 풍류객(風流客)의 자유분방함이 왕휘지(王徽之) 못지않다고 시인은 벗을 칭송한다. 역시 세속에 초연한 채, 산야에 묻히어 자연을 읊조리던 맹호연(孟浩然)을 빼닮은 시풍(詩風)을 지닌 벗이 시인은 존경스럽다. 헤어진 기간은 햇수로 3년이 넘었는데, 만남은 의외로 단촐하다. 술 한 병 앞에 놓고 말하고 웃고 한 게 전부이다. 그리고 또 기약 없이 헤어졌던 벗이 세모(歲暮)가 되니 너무도 그립다. 시인이 순흥(順興) 부사(府使)의 연회(宴會) 자리에서 들은 노래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리운 벗을 떠올리게 하는 노래임에는 분명하다. 이 노래를 듣다보면 그리움이 너무도 간절해져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될까봐 노래를 더 이상 듣지 못하고, 하늘을 바라본다. 아득한 세밑의 하늘 너머로 벗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다시 맞은 세모(歲暮), 그리워 할 벗이 있기에 시인은 결코 외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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