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설 (春雪)
춘설 (春雪)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3.01.07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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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신춘(新春)이나 신년(新年)이란 말에는 새로운 시작이나 출발의 뜻이 내포되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새로운 시작이나 출발이 있을 수 있을까? 시간은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나는 것일까? 모든 사물은 존재하는 순간부터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해간다. 그러나 시간 자체는 그저 흐를 뿐 시작이니 출발이니 하는 개념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시간에 ‘새롭다(新)’라는 형용사를 붙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처럼 새해니 새봄이니 하는 말은 그저 사람이 오랜 관습 속에서 편의상 하는 말버릇에 불과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따르고 그렇게 느낀다면, 이 또한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唐)의 시인 한유(韓愈)가 새해를 맞이하여 느낀 소회는 참으로 감각적이다.

◈ 봄눈(春雪)

新年都未見芳華(신년도미견방화)

갓 새해엔 언제나 향기로운 꽃 아직 보이지 않고

二月初驚見草芽(이월초경견초아)

이월에야 처음으로 풀싹을 보고 놀란다네

白雪嫌春色晩(백설각혐춘색만)

흰 눈이 도리어 봄빛 늦음을 미워하여

故穿庭樹作飛花(고천정수작비화)

그래서 뜰 나무를 뚫고 날아다니는 꽃이 되었다네

※ 여기서 새해는 물론 음력 새해이므로 양력으로는 보통 2월 중순 이후에 해당한다. 양력 새해보다는 봄에 가깝지만, 음력 새해 정초에도 언제나 아직 꽃은 눈에 띄지 않는다. 한 달 뒤인 2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풀싹이 보이는 것이 고작이다. 꽃이 아닌 풀싹이 보이는 것만으로도 워낙 예기치 못했던 일인지라 깜짝 놀라기까지 한다. 그것도 처음으로 말이다. 새해가 왔건만 도무지 봄은 오지 않을 것 같은 절망적 예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시인의 절망감은 뜻하지 않게 겨울의 상징인 흰 눈으로 그 불똥이 튀었다. 온 세상을 새하얗게 덮고 있는 흰 눈은 겨울의 무한함을 확신이라도 하는 듯이, 자신의 적수(敵手)인 봄이 늦게 오는 것이 밉다고 조롱하며 한껏 거드름을 피운다. 흰 눈의 거드름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자신이 있는 한 봄은 오지 않을 것이고, 봄의 주인공인 꽃 또한 피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가 꽃이 되어 봄의 분위기를 연출하기로 한다. 그래서 뜰에 있는 나무들 사이를 뚫고 여기저기 흩날리는 것이니, 이쯤 되면 스스로가 꽃 노릇을 한 게 아니고 무엇이냐고 으스댄다. 여기까지 시의 겉을 살폈으니 이제는 시의 속을 들여다 볼 차례이다.

과연 시인은 봄을 기다리는 것일까? 아니면 흰 눈의 세상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것일까 정답은 둘 다이다. 새해를 맞이한 시인에게 향기로운 꽃(芳華)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주의할 말은 도(都)와 미(未)이다. 도(都)는 모두라는 뜻으로 시인이 맞은 새해가 여러 차례였고 그 때마다 모두 꽃이 없었음을 말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다음의 미(未)는 부정사(否定詞)지만 여느 부정사(否定詞)와는 뜻이 다르다. 아직은 아니라는 것은 얼마 안 있어 곧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에 불과하다. 이런 의미에서 미(未)의 함의는 부정(否定)이 아니라 긍정(肯定)이다. 그것도 확신에 가까운 긍정(肯定)이다. 새해 정초엔 매번 꽃이 아직 보이지 않는다고 푸념했지만, 사실은 푸념한 게 아니다. 여러 차례 새해에 대한 경험을 통해 봄이 곧 올 것임을 확신하면서도 짐짓 봄이 아득하다고 배부른 투정을 하는 시인의 모습은 천진난만한 개구쟁이와도 같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절망감이지만, 그 속에는 기대감이 숨어 있다. 뜰 안의 나무 사이로 흩날리는 눈이 봄이 늦음을 미워해 꽃이 되었다고 한 것도 사실은 시인의 성급한 기대감을 표현한 것에 다름 아니다. 시인의 눈에 마당의 흰 눈은 화사한 봄꽃으로 보이니 말이다. 새해가 된 순간 봄은 머지않다. 머지않아 뜰엔 흰 눈 대신 봄꽃이 만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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