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천지(雪天地) 별천지(別天地)
설천지(雪天地) 별천지(別天地)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2.12.10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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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시절(時節)은 어김이 없다. 다만 사람이 느끼지 못할 뿐이다. 지난 가을의 잔상(殘像)에서 여전히 머무른 사이, 시절(時節)은 성큼 겨울 한복판으로 들어섰다.

겨울은 역시 눈이다. 그것도 밤사이 소리 없이 내린 눈이다. 하루 밤 사이에 계절이 바뀐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 눈 말고 또 있을까 눈은 단순한 계절의 바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난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하룻밤 사이에 만들어 낸 순백(純白)의 마법사(魔法師)이자, 사람의 마음을 청정화하는 순결(純潔)의 주술사(呪術師)이다. 조선 중기의 문인(文人) 신흠(申欽)도 밤사이 내린 눈의 마법과 주술에 빠졌음을 고백한다.

◈ 큰 눈(大雪)

塡壑埋山極目同(전학매산극목동)

골 메우고 산을 덮어, 천지가 한 세계

瓊瑤世界水晶宮(경요세계수정궁)

영롱한 옥빛세상, 반짝이는 수정궁궐이로다

人間�-흰근將�(인간화사지무수)

인간 세상 화가들 무수한 것 알겠지만

難寫陰陽變化功(난사음양변화공)

음양 변화 그 공덕을 그려내기는 어려우리라

※ 어제만 해도 골짜기엔 늦가을의 쓸쓸함이 흘렀다. 얕아진 물 위로 늦은 낙엽들이 나뒹굴었고, 이미 앙상해질 대로 앙상해진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은 소리를 내었다. 산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나무에 매달린 한 해의 사연들이 고스란히 낙엽이 되어 대지로 스밀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을의 스산함에 지쳐가면서도 사람들은 아직은 겨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룻밤 사이에 모든 것은 바뀌었다. 크리스마스 카드에서나 나올 법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 순간에서야 사람은 겨울이 이미 와 있었음을 깨닫는다. 골짜기며 산이며 할 것이 없다.

눈이 닿는(極目) 곳이면 어디나 한 가지였다. 그것은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었다.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맑은 빛깔의 주인은 옥(玉)이고, 옥(玉)중에도 가장 미질(美質)이 뛰어난 옥(玉)이 경요(瓊瑤)이다. 세상에서 가장 맑은 존재인 경요(瓊瑤)로 이루어진 세계는 속세의 더러움으로부터 자유로운 공간이다. 시인은 경요세계(瓊瑤世界)로도 눈 세상을 표현하는 데 성이 차지 않는다. 아직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느낀 시인이 찾아 낸 것은 또 다른 맑음의 상징적 존재인 수정(水晶)이다. 맑고 맑은 옥(玉)으로 이루어진 세계에 세워진 맑은 수정(水晶)으로 지은 궁궐, 즉 맑음 위에 또 다른 맑음을 더해야만 비로소 눈(雪)의 맑음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한 없이 맑은 눈의 세계를 과연 사람이 만들 수 있을까? 시인은 단호하다. 만들기는커녕 보고 그려내기도 어렵다. 그것도 보통 사람이 아니고, 그림의 달인(�-�)이 그렇다. 인간사에 내노라 할 수많은 화가들을 모두 알아봤지만, 눈의 세계를 제대로 그려 낸 적은 결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눈이 만든 세상은 음양변화(陰陽變化) 곧 조물주(造物主)의 작품(功)이기 때문이다.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고,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영역, 그것이 눈의 세계이다.

밤새 내린 눈으로 세상은 온통 새하얗게 바뀌었다. 맑은 옥(玉)으로만 된 세계에 맑은 수정(水晶)의 궁궐이 세워 졌다는 감탄은 신흠(申欽)이라는 시인의 몫만은 아니다. 조물주(造物主)의 조화(造化)가 빚은, 순백순결(純白純潔)한 눈의 세계를 감탄하는 것은 세파(世波)에 찌든 사람들과 겨울을 힘겹게 지나가야 하는 삶들에게 도리어 절실한 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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