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밤
군밤
  • 이효순 <수필가·청주 덕성유치원장>
  • 승인 2012.11.25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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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이효순 <수필가·청주 덕성유치원장>

화려했던 나뭇잎은 모두 지고 앙상한 가지만 겨울의 찬바람에 쓸쓸하다.

초겨울이 가을을 밀어내고 내 곁으로 다가올 때면 어린 시절에 있었던 따뜻한 기억이 되살아난다. 얼굴모습도 생각나지않는 분인데 나이가 육십이 넘어도 잊히질 않는다. 군밤 아저씨다.

60년대는 가을걷이가 끝나면 시골학교에서는 수학여행을 많이 갔다.

지금은 사계절에 따라 학교 실정에 맞게 가지만 그때는 추수를 해야 시골에 돈이 돌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를 마무리하는 6학년 졸업여행이기에 우리 반도 예외는 아니어서 수학여행 갈수 있는 아이들을 담임선생님께서 파악하던 중이었다. 수학여행을 거의 가고 반에서 몇몇 아이들만 갈수 없다고 하였다. 그중에 나도 포함됐다.

우리 집은 추수를 하여도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여행비를 내지 못했다.

집에 돌아와 시무룩하게 있을 때 담임선생님이 가정방문을 하셨다.

쌀 한말 만 팔면 보낼 수 있는 것을 왜 보내지 않느냐며 선생님은 부모님을 설득하셨다. 어머니는 이튿날 검은 콩을 한말 시장에 내다 팔아 수학 여행비를 마련해 주셨다.

선생님의 권유로 친구들과 수학여행을 함께 갈수 있어 어린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청주역인지 조치원역인지 모르겠으나 우린 서울 가는 기차를 탔다. 기차 안에는 군밤, 삶은 계란, 구운 오징어 캐러멜, 김밥을 가득 담은 밀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모처림 기차를 탄 시골 소녀는 물건을 싣고 밀고 가는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김밥 있어요. 김밥, 군밤 있어요.” 라고 말하며 손님이 있는 가운데로 지나갔다.

그 때 옆에 앉았던 어떤 분이 말을 걸어 서울 수학여행 간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종이 봉지에든 따끈따끈한 군밤을 사서 내 손에 들려주셨다.

그 밤봉지를 받아든 손은 차츰 따듯해졌다.

마치 할머니가 찬 손을 녹여주시는 것처럼. 수줍어서 감사하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말없이 웃으며 고마움을 전했다.

종이 봉지 안에 있는 군밤은 고소한 냄새와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져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그분은 군밤을 하나 꺼내어 얼른 껍질을 벗겨 내게 주었다. 따끈하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다음 역에서 기차가 설때 ‘구경 잘 하고 오너라.’ 라는 말을 남기고 기차에서 내려 총총 걸어가셨다.

아직도 그 얼굴은 생각이 나지 않으나 따뜻했던 군밤의 온기가 손으로 전해지던 기억만은 잊히질 않는다.

잎이 지고 나무가 앙상해지니 정이 담겼던 군밤의 기억이 더 선명해진다. 지금 생각하니 내 또래의 딸 생각이 나서 사주셨던 것은 아니었을까! 자식을 키워보니 그분의 마음이 더 간절하게 생각난다.

살아가며 마음을 잔잔하게 감동시키는 것은 아주 작은 정이 담긴 배려다.

스산해지는 초겨울의 문턱에 수학여행 길에 만났던 그분의 정이 듬뿍 담겼던 군밤을 그리며 외로운 사람들이 더 춥지 않도록 작은 불씨를 피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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