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이유
존재의 이유
  • 허세강 <수필가>
  • 승인 2012.11.18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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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허세강 <수필가>

이른 아침 거실에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봤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죽어 없어진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는 생각이었다. 아직까지 나는 내가 죽는다는 것에 대해선 결코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무엇 때문에 사는가?

이는 인간 본질의 문제로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사유(思惟)케 하는 꽤나 머리 아픈 생각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죽어 없어진다면 과연 이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한 마디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란 결론을 도출해 냈다. 오늘 내가 죽는다 해도 내일 아침, 태양은 역시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질 것이다. 내가 매일 다니는 길도 그대로 있을 것이고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물론 주변의 산도 개울도 그대로 있을 것이다. 또한, 이 나라의 정치도 언제나처럼 갈등과 소통을 반복하면서 선진복지국가를 향해 더욱 발전해 나갈 것이다.

나의 죽음에 몇몇 친구들과 지인들이 빈소에 들러 아주 잠깐 애도의 뜻은 표시하겠지만, 그것이 그들의 일상생활에는 조금도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나라는 사람이 존재하였던 사실은 까마득한 잊혀진 전설이 되고 말 것이다.

허무하기 그지없고, 산다고 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가 없으면 안 될 곳이 딱한 곳이 있다.

바로 우리 가족이다. 내가 없으면 사랑하는 딸과 아내를 누가 나만큼 돌보고 지켜주겠는가. 나 말고는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는 것이 나의 가족이다.

그렇다면, 가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나의 존재 이유인가?

비로소 우매한 나는 가족이 내 삶의 최고의 가치란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하찮은 동물들도 제 새끼를 지키고 챙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데 그렇다면 내가 그들과 다른 것이 무엇이 있는가?

딸아이와 함께 원주 헌혈의 집에 갔다.

헌혈신청자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나눔과 베풂을 실천하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번호표를 뽑아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나는 생활신조가 봉사는 받지도 않고 하지도 않겠다는 극단적 이기주의자이며 헌혈을 하게 되면 빈혈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아직까지 헌혈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딸아이가 “아빠도 한번 해봐 아무렇지도 않고 괜찮아”라며 나에게 적극적으로 권유했다. 난생처음이라 겁이 났지만, 딸의 성화에 신청했다.

침대에 누워 팔에 꽂힌 주삿바늘을 통해 고무호스를 타고 흘러나오는 빨간 혈액을 보며 나도 드디어 다른 사람을 위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꺼져가는 한 생명에 밝은 빛을 줄 수 있게 되었다는 가슴 벅찬 뿌듯함을 느꼈다.

헌혈을 마치고 침상을 내려와 창밖을 내다보니 이 세상이 아까 더욱 더 밝고 희망으로 가득 차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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