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전 두 닢의 비밀
엽전 두 닢의 비밀
  • 허세강 <수필가>
  • 승인 2012.11.04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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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허세강 <수필가>

재작년에는 벌초를 하다가 아들 녀석이 벌에 쏘여 병원으로 긴급 후송해 진료를 받는 난리법석을 떨었다.

작년엔 지난번에 너무 고생을 하여 조심했는데도 숨어있는 벌집을 건드려 내가 얼굴에 몇 방을 쏘였다. 갑자기 눈 주위가 부어올라 앞의 물체를 제대로 식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는 수 없이 작업을 중단하고 산을 내려 왔다. 언젠가는 아버지산소에서 벌초를 하다 벌에 쏘여 70대 노인이 사망하였다는 뉴스를 본적이 있다.

어느 집안이나 비슷하겠지만 조상의 산소 벌초문제 장난이 아니다. 우리 세대에는 어찌한다고 하겠지만 손자대에 이르러서도 지금처럼 유지관리 될 수 있을지 우려된다. 벌초 때면 형제들이 부득이한 사정을 들러대며 불참통보를 해와 등 굽은 소나무 조상묘 지킨다고 고향에 사는 내가 도 맡아 해야 할 때가 많다.

아버지께서 향년 83세로 세상을 뜨셨다.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7년전 선산에 위대 10위의 묘역을 정리하면서 자신의 가묘와 비석까지 세워 놓으셨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를 국립이천호국원 참전용사 묘역에 안장시켰다. 선친의 뜻에는 많이 어긋났지만 다가올 미래를 위해선 변화와 혁신이 필요했다. 아버지 장례를 모신 다음, 매장한지 60년 이상이 경과한 선대 7위 6기의 묘소도 천분하여 자연수목장으로 재봉안하기로 형제들과 협의했다. 드디어 택일한 날이 도래하여 소박한 제례를 봉행한 후 137년이 경과한 고고조부(高高祖父)의 묘소 개장을 시작하였다. 체백을 수습하여 보니 6척 장신의 기골이 장대하신 분이셨다. 그리고 부장품으로 엽전 두 개가 출토되었다. 너무 신기하여 붙은 흙을 털어내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상평통보(常平通寶)였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져와 소장하고 있는 상평통보 수백여점과 비교해 보았다. 상평통보는 조선시대의 엽전으로 한가운데 네모구멍이 하나 있는데 산소에서 출토된 이것은 네모구멍 모서리에 각각 작은 구멍이 한 개씩 네 개 더 뚫려 모두 다섯 개였다. 인터넷을 검색하며 이와 유사한 것이 있는지 역사적 사료로서 가치가 있는 것인지 확인하려고 노력해 봤다. 하지만 어디에도 구멍이 다섯 개인 상평통보는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왜 이 엽전만 구멍이 다섯 개 일까? 점점 궁금해 졌다. 밥을 먹으면서도, 잠을 자면서도, 길을 가면서도 온통 구멍 다섯 개인 상평통보 생각이었다. 마침내 그 이유를 어렴풋 짐작해 냈다. 양천허씨(陽川許氏)는 시조 할아버지로부터 후대에 전해 내려오는 ‘가전충효 세수청백’(家傳忠孝 世守淸白 ·집집마다 충성과 효성을 다하고 자자손손 청렴과 결백을 지켜라)는 선조유훈(先祖遺訓)이 있다. 아마도 이 엽전 두 닢은 남다른 효성이 지극했던 고고조할아버지의 손자, 즉 나의 증조부(당시 9세)께서 구멍을 뚫어 가지고 놀며 애지중지했던 것을 할아버지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노잣돈으로 드렸던 것으로 나름의 결론을 지었다.

선조의 거룩한 효정신이 내 가슴을 뜨겁게 하였다. 오늘은 가전충효(家傳忠孝)의 모범을 보이시며 한 평생 조상숭배에 모든 것을 바쳐 오신 아버지께서 내 곁을 떠나신지 1년이 되는 첫 기일이다. 제례를 마치고 호국원 뜨락에서 파란 하늘을 처다 보았다. 아버지께서 엄청난 불효를 저지른 내게 무슨 말을 하실 듯 흐릿한 미소를 지으시며 창공속으로 아스라이 멀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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