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거추명
산거추명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2.10.29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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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 중의 하나가 산은 고요하다는 것이다. 공자(孔子)는 인(仁)한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고요하다고(仁者樂山, 仁者靜) 말한 것도 따지고 보면, 산은 고요하다는 관념의 소산이다. 과연 산은 고요하기만 할까 그렇지 않다. 멀리 산 밖에서 볼 때 산은 고요하겠지만, 산 속으로 들어가서 자세히 살펴보면 산에는 이런저런 움직임과 다양한 소리들이 혼재해 있다. 탕(唐)의 시인 왕웨이(王維)의 눈에 비친 산속 모습 또한 이러하다.

◈ 산속의 가을 저녁

空山新雨后(공산신우후) 텅빈 산에 막 비 내리고 난 뒤

天氣晩來秋(천기만내추) 하늘의 기색을 보니 날은 저물어 가을이 왔다네

明月松間照(명월송간조) 보름달은 소나무 사이로 비추고

淸泉石上流(청천석상류) 맑은 샘물 돌 위에서 흐른다

竹喧歸浣女(죽훤귀완녀) 대나무 소란한 것은 빨래하던 아가씨 돌아감이고

蓮動下漁舟(련동하어주) 연꽃이 움직이는 것은 고깃배 내려감이라

隨意春芳歇(수의춘방헐) 자연의 섭리대로 봄풀들은 다 없어지고

王孫自可留(왕손자가류) 귀하신 몸도 스스로 머물 만하네

온갖 나무와 풀, 새와 짐승들이 깃들어 있어도 산을 텅 비었다고(空山) 하는 것은 번거로운 인간사를 뒤로 하고 홀로 산에 들어온 시인의 마음이 비었기 때문이다. 마침 막 내리던 비가 그친 참이다. 인간사의 번다함을 비워낸 시인은 이젠 무언가를 채울 차례이다. 잠깐 내린 비로 깨끗해 질대로 깨끗해진 데다 때 마침 가을 저녁이라 맑아 질대로 맑아진, 산속의 풍광이 텅 빈 시인의 마음을 채운다. 그의 마음에 먼저 들어온 것은 보름달(明月)이다. 그것도 소나무 사이로 비추는 보름달이다. 달의 밝음에 소나무의 고결함이 더해졌으니 가히 환상적 조합이다.

하늘로 향했던 시선(視線)은 땅으로 옮겨진다. 땅에서 그의 눈에 띈 것은 맑은 샘물이다. 그것도 돌 위를 흐르는 맑은 샘물이다. 그 자체로도 맑은 샘물이 깨끗한 돌 위를 흐르니 더욱 맑게 보일 수밖에. 모든 것은 시인의 마음이 비워진 뒤에 벌어진 일이다. 보름달과 소나무, 맑은 물과 돌은 흔한 모습들이지만, 마음이 번거로운 인간사로 가득 찼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았을 뿐이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실감하는 순간이다. 마음을 비우고 나니 죽어있던 시인의 감수성이 놀라운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숲속 한켠의 대나무 숲이 일순 소란하다. 말은 소란하다(喧)고 했지만 정작 시인이 나타내고자 한 것은 초저녁 숲속의 고요함이다. 이런저런 소리가 들리는 대낮 같으면 잘 들리지도 않았을 대나무 소리가 소란하게(喧) 들리는 것은 가을 초저녁 숲속의 정적(靜寂) 때문이다. 마음이 빈 만큼 시인의 감수성은 예리하게 반응할 수 있다. 여기에 빨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가씨의 정갈한 아름다움을 오버랩시킨 시인의 감수성은 경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감수성의 예민함은 청각(聽覺)에만 있던 게 아니었다.

예민해 질대로 예민해진 시인의 시각(視覺)이 연꽃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는다. 대낮에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 눈에 띈 것은 초저녁 산속에서 모든 움직임이 멈추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시인은 욕심 없이 소박하게 사는 어부의 모습을 배합하는 능숙함을 뽐낸다. 마음을 비운 시인에게 산속은 속박이 없는 공간이다. 모든 것이 자연의 섭리대로(隨意)이다. 봄풀(春芳)이 시드는 것도 예외가 아니다. 모든 것이 자연의 순리대로 움직이는 산속이야말로 절대 자유의 공간임을 깨닫고 나서야, 시인은 먼 옛날 산속에 들어가 기어이 나오지 않았던 귀하신 몸(王孫)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가을 초저녁의 산속은 결코 고요하지 않다. 정작 고요한 것은 시인의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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