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신앙
가을의 신앙
  • 김성수 목사 <청주 새순교회>
  • 승인 2012.10.15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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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의 목소리
김성수 목사 <청주 새순교회>

어느 해보다도 무더웠던 여름을 지나 대지를 갈라놓던 가뭄 후에 두어 차례 맹렬한 태풍이 휩쓸고 간 들녘에 애타던 농심을 비껴가기라도 하듯이 오백백과가 노랗게 익어가고 있다.

지난 주 경남의 몇몇 농촌 들녘을 돌아보는 시간이 있었다. 거창과 산청, 산초, 진주 근교의 농촌 들녘을 차를 타고 지나치면서 충북에서 태어나서 대부분의 시간을 충북에서만 보냈던 필자의 눈에 비친 넓은 들판은 가슴을 시원케 해주었다. 병풍처럼 겹겹이 둘러선 지리산 자락의 높은 산들은 수백 년 이 땅에 살아온 조상들의 손길이 닿아 있는 듯한 숨결이 느껴졌다.

허준이 저 산에서 약초를 캐고, 유의태 선생을 만나 의술을 익히고 명의가 된 그 발길이 저 산에 머물러 있었겠지 하며 먼 산을 바라볼 때는 과연 위대한 자연이 이 민족을 품어 주었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아직도 태풍이 할퀴고 간 도로로 어떤 신혼부부는 그 길을 지나다 어디가 도로인지 분간을 못하고 도로 밑 아득한 낭떠러지로 떨어졌단다. 간신히 몸만 빠져나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니 다행이었다. 산줄기를 따라 엄청난 물줄기가 내려와 과수원 한 가운데로 지나갔다. 과일이 매달린 채 쓰러진 사과열매가 애처로이 익어가고 있었다. 벼를 심은 논이 있었다고 하는데 논은 간데없고, 흙으로 덮여 자취도 없다. 얼마나 허탄했을까 자식처럼 길러온 농작물이었을 텐데 말이다. 그래도 대부분의 논과 밭에 아름다운 가을이 익어가고 있었다. 자연은 그렇게 스스로를 치유하고, 회복시키고, 또 다른 생명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김현승 시인은 '가을의 기도'에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또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라고도 노래했다.

사람은 누구나 아픔을 피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인생의 아픔은 필연이고, 그 아픔은 더 높은 이상을 만들어 내고, 더 값진 열매를 만들어 내고, 더 비밀스런 생명력을 만들어 내는지 모른다. 아둔한 인생들이 피하고 싶어 하는 아픔과 고통과 시련과 연단이 어쩌면 보이지 않는 인생의 스승인지도 모른다.

왜 가을이 아름다운가? 왜 석양이 아름다운가? 왜 노년의 쓸쓸함이 아름다운가? 그 아름다움 뒤에 숨겨진 봄과 여름의 수고와 하루 온종일 대지를 운행한 감춰진 열정과 만고풍상을 겪은 인생의 발자취가 묻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에 아플 때 낙심하지 말자. 힘들 때 포기하지 말자. 인생의 무거운 짐들이 겹겹이 찾아와도 세월의 약이 더 성숙하게, 더 아름답게, 더 빛나게 만들 나의 미래를 생각하자. 어쩌면 이것이 이 땅의 가을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숨은 그림 찾기인지도 모른다.

시인 F. R. 해버갈(F. R. Havergal, 1836~1879)은 "어두운 후에 빛이 오며 바람 분 후에 잔잔하고, 소나기 후에 햇빛 나며 연약한 후에 강건하고, 애통한 후에 위로받으며 슬퍼한 후에 기쁨 있고, 멀어진 후에 가까우며 고독한 후에 친구 있고, 고통 속에 승리하며 실패 후에 성공하네"라고 고통 너머의 환희를 노래했다. 오늘 텅 빈 나의 들판을 바라보며 실망하는 이도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쓰러져 가는 과일나무, 상처 입은 열매를 보면서 허허로운 웃음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실망하지 말자. 푸시킨의 시구(詩句)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 것이고, 절망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반드시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지나가고 난 뒤에는 그것도 소중하게 될 것을 믿기 때문이다.

이 가을에 열매에 담긴 봄과 여름의 향기를 맡아 보자. 아픔에 담긴 진한 삶의 향기를 맡아 보자.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다가올 때 너무 쉽게 포기하거나, 너무 쉽게 절망하지 말고 아픔의 순간을 이겨내자. 더 깊은 신앙을 위해. 신앙의 열매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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