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살 밤골 소년의 가을 노래
여덟 살 밤골 소년의 가을 노래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2.10.08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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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뒤뜰의 누런 밤은 벌이 아니더라도 터진다는(後園黃栗不蜂) 김삿갓의 말마따나, 바야흐로 밤 터지는 철이 왔다. 김삿갓의 뒤뜰만이 아니고, 앞산 뒷산 옆산 할 것 없이 터지는 밤, 그 밤나무가 빼곡한 마을이 밤골 즉 율곡(栗谷)이다. 이 땅에 흔하디흔한 게 밤나무인지라, 밤골을 이름으로 한 마을도 한둘이 아니다. 이 중 하나가 파주 파평의 밤골이다. 조선 선조 때의 유학자 이이(李珥)가 가향인 이곳의 이름을 따서 율곡(栗谷)을 자신의 아호로 삼은 덕에, 파주 파평의 율곡은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밤골이 되었다. 이율곡은 어려서 이 마을 어귀에 세워진 정자에서 노닐곤 했는데, 임진강 가에 위치한 화석정(花石亭)이 그것이다. 이율곡은 화석정을 제목으로 한 시를 남겼는데, 그의 나이 여덟 살에 지었다하여 팔세부시(八歲賦詩)로 더욱 유명하다.

◈ 화석정(花石亭)

林亭秋已晩(임정추이만) ; 숲 속 정자에 가을 날 이미 저무니

騷客意無窮(소객의무궁) ; 글쟁이의 상념 끝이 없어라

遠水連天碧(원수연천벽) ; 멀리 보이는 물은 하늘과 맞닿아 더욱 푸르고

霜楓向日紅(상풍향일홍) ; 서리 맞은 단풍나무 해를 향하여 붉어라

山吐孤輪月(산토고윤월) ; 산은 외로운 둥근달을 토해내고

江含萬里風(강함만리풍) ; 강은 만리나 되는 긴 강바람을 머금었구나

塞鴻何處去(새홍하처거) ; 변방의 기러기는 어디로 가려는지?

聲斷暮雲中(성단모운중) ; 울음소리 저녁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



굽이쳐 흐르는 임진강 강둑 숲에 고즈녁하게 자리 잡은 정자, 화석정에도 가을이 내려앉았다. 한 해가 저물고, 하루가 저물고, 이렇게 저무는 분위기에 취한 시인 또한 저문다. 그래서 그의 상념은 끝이 없는 것이다. 소객(騷客)은 이소(離騷)의 작가로 알려진 굴원(屈原)을 연상시키는 말로서, 벼슬을 떠나 강호(江湖)를 떠도는 시인을 일컫는 말이다. 여덟 살의 이율곡이 쓸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강가에서 저뭄에 취한 어린 시인은 자신을 초(楚)의 도읍을 떠나 운몽택(雲夢澤)을 떠돌던 굴원(屈原)에 대입한 것이다. 어린 나이라 해서 우국충정(憂國衷情)의 분만(憤)을 품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여덟 살 나이는 일러도 너무 이르다. 이것은 천재(天才)라기보다는 차라리 조숙(早熟)이다. 그러나 조숙(早熟)의 불안정감은 곧 이은 능숙한 천재(天才)에 의해 안도감으로 바뀐다. 강물과 하늘의 만남은 푸름과 푸름의 만남이다. 단풍과 석양의 만남은 붉음과 붉음의 만남이다. 한시(漢詩)의 작시규칙(作詩規則)의 하나인 대장(對仗)의 능숙함에 감수성까지 듬뿍 담아냈다. 여덟 살 아이의 도무지 믿기 어려운 천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단풍에 붉은 빛을 보태고 사라진 석양을 대신해 둥근 달이 떠올랐다. 그냥 떠오른 게 아니다. 산이 자신의 뱃속에서 뱉어낸 것이다. 달도 그냥 달이 아니다. 수레의 두 바퀴 중 하나가 하늘로 외롭게 떨어져 나가서 달이 된 것이다. 강에 바람이 부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만리타향에 떨어져 있는 그리운 님의 체취를 실은 바람이기에 입에 머금어 그 맛을 음미한다. 동화 같은 상상력에 수채화 같은 감수성이다. 마지막은 기러기가 장식한다. 가을 하늘의 진객(珍客) 기러기가 울음소리를 저녁 구름 속에 남겨 놓고 하늘 저편으로 사라지면서 시는 끝나지만, 지금도 여전한 것은 여덟 살 밤골 소년의 조숙(早熟)을 넘은 천재(天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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