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사랑으로
  • 이제현신부 <매괴여중·고 사목>
  • 승인 2012.09.24 21: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낮은 자의 목소리
이제현신부 <매괴여중·고 사목>

얼마 전 저희 교구의 한 신부님께서 말기 암 환우들에게 호스피스 활동을 하시는 성모 꽃마을을 다녀왔습니다. 신부님께서는 한 주간 동안 암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환우들에게 교육을 하고, 마지막 날에 그분들에게 암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하느님의 축복을 전하고 기도하는 병자성사를 주시는데 몇몇 신부들을 초대하셨습니다.

넓지 않은 성당에 들어가서 본 형제님과 자매님의 짧은 머리에서 그분들이 암과 싸워온 여정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분위기는 암으로 고통받지 않는 분들보다 훨씬 맑고 밝았습니다. 미사 중 신부님의 강론 말씀에서 그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는데,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암 때문에 만났으니 이보다 더한 인연이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암에게 "고마워."라는 인사를 하자고 하셨고, 환우들은 주저하지 않고 큰 소리로 따라하셨습니다. 암을 벗 삼아, 같은 짐을 지고 가는 형제, 자매를 가족처럼 여기는 그 모습 속에서, 슬픔과 두려움, 아픔을 이겨낼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처음부터 암에 대해 그처럼 의연한 자세를 취한 분들은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병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과 분리시켜, 평소에 외면하던 고독과 대면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홀로 있어도 홀로 있을 수 없는 존재가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환우들은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던 분들도, 서로 사랑으로 맺어진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로 무장한 우리는 고통의 여정에서 인간관계를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기쁨은 함께하지만 고통은 각자 알아서 헤쳐나가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죽음까지 함께 할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보다, 당장 이익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를 선호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무심코 동조하곤 합니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우리는 '이웃사촌'이라는 말도 유명무실(有名無實)해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연일 흉악범죄에 대해 보도하는 언론을 통해, 이웃을 용의자로 보는 것에 길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편승하여 일어나는 사형제에 대한 논의에 반대하는 것을 주저합니다. 사실 죄가 나쁜 것은 흉악한 범죄 '행위'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것은 억지 논리입니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생명을 누리고 나누며 살아가도록 태어난 우리의 소명을 피하면서, 다른 이들도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도록 조장하는 사람들 안에는 정의도 사랑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정의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암을 통해서 사랑으로 맺어진 사이를 알게 된 환우들처럼, 우리도 일상에서 경험하는 부서진 인간관계를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어두운 기억보다 사랑에 더 민감할 수 있는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해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