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서(?)
피서(?)
  • 이제현 신부 <매괴여중·고 사목>
  • 승인 2012.08.06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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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의 목소리
이제현 신부 <매괴여중·고 사목>

해마다 여름이 점점 더 뜨거워집니다. 에어컨이 없어도 견딜 수 있었던 때가 언제인지 가물가물합니다. 보통 피서는 멀리 대자연으로 떠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는데, 이제는 에어컨이 있는 곳에 가면 피서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대학교에는 에어컨이 있는 곳에서 피서하는 젊은이들이 꽤 많습니다. 계절학기 대학원 수업을 들으면서 도서관에 가보면, 저마다 꿈을 펼쳐놓고 공부하는 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에어컨의 바람도 식힐 수 없는 열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편 이열치열(以熱治熱)이라는 말처럼, 운동장 곳곳에서는 더위를 이기며 운동하는 함성이 들립니다. 그리고 강의실과 떨어진 동아리 방에서는 기타, 드럼, 노래 연습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처럼 돈도 정신도 소비하기 쉬운 소극적 피서가 아니라, 생산적인 활동을 통하여 더위를 이겨내는 적극적인 피서가 참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사실 당장 뜨겁고, 땀 흘리게 하는 더위는 우리에게 고통을 선사하기 때문에 즐겁게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뜨겁고, 당장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그 뙤약볕 덕분에 자연은 성장해 갑니다. 들판의 곡식도, 산의 열매도 시나브로 익어갑니다. 그래서 더위는 피하기만 할 것이 아닌, 당장 알아듣기 어려운 고통의 신비를 보여주는 표징처럼 느껴집니다.

때로 우리의 삶의 자리도 여름 날씨처럼 견딜 수 없이 뜨거울 때가 있습니다. 참을 수 없는 현실에 불만, 불평은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불볕더위 아래 영글어가는 열매의 마음으로 고통의 순간을 지나간다면 우리 삶도 성숙해지리라 믿습니다.

하느님이면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온 예수님이 직면한 현실은 굉장히 뜨거웠습니다. 거대한 로마 제국의 압제에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예속되어 있었고, 민족적 기반이 되는 신앙도 생존의 현실보다 우선순위에서 밀려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부조리한 현실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옛 법대로 폭력으로 혁명을 꿈꾸는 사람도 있었고, 시대에 순응하거나 타협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고통을 피하지 않고, 그 한가운데로 걸어갔습니다. 그래서 고통을 준 사람들은 사라졌지만, 십자가를 지고 못 박히고 죽은 고통을 겪었던 예수님은 여전히 신앙인들의 공동체 안에 살아있습니다.

그러므로 무더위를 피해 도망치듯 떠나기보다, 이웃과 세상의 고통을 마주하고 희망으로 성숙해지는 피서를 해보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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