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엔 그대가 그립다
여름엔 그대가 그립다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2.07.16 22: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연이은 열대야에 잠 못 드는 밤, 선풍기는 질식이다 뭐다 해서 꺼림칙하고, 에어컨은 냉방병이다 산소부족이다 해서 영 마뜩치 않을 때, 퍼뜩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으니 작년 여름 지나며 장롱 속에 고이 모셔둔 그 분, 이름 하여 죽부인(竹夫人)이다.

차가운 물성(物性)으로 여름에 환영받는 죽제품에다, 남의 아내에 대한 존칭어인 부인(夫人)을 처음 갖다 붙인 사람이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여름 나기 용품에 불과한 이 물건이 많은 선비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된 것은 아무래도 풍류(風流) 넘치는 그 이름 덕임에 틀림없다. 풍류(風流) 하면 둘째가기 서러운, 여말(麗末)의 천재 시인 이규보(李奎報)가 이를 그냥 지나칠 리 없다.

죽부인(竹夫人)

竹本丈夫比(죽본장부비) : 대나무는 본디 사내대장부의 벗이라서

亮非兒女隣(량비아녀린) : 정말이지 아녀자의 짝은 아니라네

胡爲作寢具(호위작침구) : 어쩌다가 잠자리 용구가 되어

强名曰夫人(강명왈부인) : 억지로 이름 붙여 부인이라 불리는가

지我肩股穩(지아견고온) : 내 어깨와 넓적다리 괴니 편안하고

入我衾주親(입아금주친) : 내 홑이불 속으로 들어오니 친근하기 그지없네

雖無擧案眉(수무거안미) : 눈썹과 나란하게 밥상 드는 일은 못해도

幸作專房身(행작전방신) : 다행히 방을 독차지하는 몸은 된다네

無脚奔相如(무각분상여) : 쓰마샹루(司馬相如)에게로 달아난 쭤원쥔(卓文君)의 다리도 없고

無言諫伯倫(무언간백륜) : 술꾼 류링(劉伶)에게 하는 하소연도 없도다

靜然最宜我(정연최의아) : 말없어도 나와 가장 잘 어울리니

何必西施嚬(하필서시빈) : 어찌 꼭 찡그려도 아름다운 씨스(西施)라야 할까?

시인은 먼저 대나무의 품성에 대해 일갈한다. 아녀자 같은 여린 성격이 아니고, 사내대장부의 강건한 품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나무가 시시하게 잠자리의 용구로 된데다, 이름마저 여성을 뜻하는 부인(夫人)이라 한 것을 시인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푸념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인의 푸념은 내숭일 뿐이었다.

체신에 맞지 않게 침구(寢具)면 어떻고, 어울리지 않게도 이름에 부인(夫人) 자가 붙어 있으면 어떠랴? 좋으면 그만인 것이다. 어깨며 넓적다리며 몸을 괴면 이보다 더 편안할 수 없고, 이불 속에 함께 있어도 전혀 싫지가 않다. 비록 밥상을 눈썹까지 들어 올려 남편인 량훙(梁鴻)에게 바치는 멍꽝(孟光)의 공순함이 없이도, 너끈히 안방을 독차지한 매력의 소유자가 죽부인(竹夫人)이라는 것이다. 또한 애인을 좇아 집에서 도망친 쭤원쥔(卓文君)도, 술꾼 남편에게 통사정을 한 류링(劉伶)의 처도 아니지만, 시인에게는 조용한 모습의 죽부인(竹夫人)이 마냥 최고라고 실토한다. 그러면서 미색(美色)이 맘에 걸렸던지, 시인은 찡그린 모습마저도 어여쁜 씨스(西施)여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로 사랑 고백을 마감한다. 여름에는 뭐니 뭐니 해도 시원한 게 최고라는 말을 재치와 유머로 에두른 솜씨가 경탄을 자아낸다.

시와 술 그리고 거문고를 지독하게 좋아하여 스스로를 삼혹호(三酷好)라 부른 이규보(李奎報)는 여름에만은 죽부인(竹夫人)을 끼고 살았으니, 그 별호를 여름에는 사혹호(四酷好)로 바꿔 불러야한다. 하지만 무더워 잠 못 드는 여름밤에 죽부인(竹夫人)을 그리워하는 사내대장부가 어디 이규보(李奎報)뿐이겠는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