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와 해어(解語)
장미와 해어(解語)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2.06.25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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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면서 아무래도 봄의 여운이 더욱 진해지기 마련인데, 어느 날 문득 담장 너머로 보이는 유월의 덩굴장미가 봄에 대한 미련을 씻어준다. 주인공은 맨 마지막에 등장한다는 말을 의식한 듯, 늦깎이 꽃 장미는 유월에 느지막이 유유히 나타나 도도한 자태를 뽐낸다. 요염한 자태에 농염한 향내, 거기에 앙칼진 가시까지 팜므파탈 자체다. 15세기 완고한 유가(儒家) 선비였던 김시습(金時習)은 장미와 전혀 무관할 듯하지만, 그도 이 치명적 매력의 소유자를 피해 갈 수 없었다. 매화를 좋아하여 아호마저 매월당(梅月堂)이었던 매화 바보의 장미타령이라니 흥미로움이 배가될 수밖에.

갓 피어난 장미 한 송이(四季一朶始開)

一點臙脂惱殺人(일점연지뇌쇄인) : 한 점의 연지인지 남의 애를 다 태우는데

含羞半掩自精神(함수반엄자정신) : 부끄러워 반 쯤 숨었어도 생기는 감출 수 없어라

若敎解語應傾國(약교해어응경국) : 만약 말을 알아듣도록 했다면 경국지색이 당연할 테니

不獨西施與太眞(불독서시여태진) : 경국지색이 서시와 양귀비만 있던 게 아니었네

과연 조선 선비답다. 클레오파트라니 퀸엘리자베스니 하는 사계(四季)장미 이름을 알 리 없는 시인은 토종 냄새가 물씬 나는 언어로 장미를 그리고 있다. 장미를 연지(臙脂)라고 한 것은 그 붉은 빛깔 때문만은 아니다. 연지는 혼례 때 새색시 볼에 찍는 화장품이기 때문에 장미가 연지라는 것은 결국 장미가 연지 찍은 새색시라는 뜻이 된다. 연지처럼 붉은 색은 기본이고 여기에 수줍고 어여쁜 새색시의 이미지를 장미에게 부여한다. 그 모습이 얼마나 요염했으면 절제의 달인인 조선 선비의 입에서 뇌쇄(惱殺)라는 과다 노출의 형용사가 다 튀어나왔을까? 장미의 팜므파탈 이미지를 갓 쓴 선비가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니 새삼 장미의 시공초월 매력이 실감난다.

수줍은 듯 몸의 반은 가렸어도 그 끼마저 숨길 수 없다고 노래한 시인의 뇌리엔 장미의 새색시 이미지가 여전하다. 잉글리시가든로즈 장미 부케를 든 신부를 발상하는 것과 장미와 연지 찍은 새색시를 짝 지우는 것은 과연 우연한 같음일까?

시인은 장미를 연지 찍은 새색시로 말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은 듯, 좀 더 강렬한 메터퍼(隱喩)를 찾아냈으니, 경국(傾國)이 그것이다. 경국은 경국지색(傾國之色)의 준말로 한 나라를 망칠만큼 미색이 뛰어난 여자를 일컫는 말이다. 오(吳)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월(越)의 미녀 서시(西施)와 당(唐) 현종(玄宗)을 피난케 했던 양귀비(楊貴 妃)는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경국이다. 이 경국(傾國)은 뇌쇄(惱殺)보다 한 등급 강도를 높인 미인에 대한 형용이다. 군주가 나라를 말아먹어도 내려놓지 못하는 여인에게는 미모 이상의 무엇이 있을 것이다. 시인은 장미가 단순히 아름다운 게 아니라, 한번 빠지면 도무지 헤어나지 못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말함으로써 팜므파탈 이미지보다도 강렬한 이미지를 그리고자 한다.

뇌쇄(惱殺)며 경국(傾國) 같은 말은 장미를 극찬하는 말이지만 상투적 개념이라서 밋밋함을 면하기 어려운데, 이러한 밋밋한 분위기를 살린 것이 초반에 연지(臙脂)였다면, 말미에는 해어(解語)라는 말이다. 말을 할 줄 아는 꽃이라는 뜻의 해어화(解語花)가 기생(妓生)을 뜻한다는 것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말을 할 줄 아는 장미는 경국(傾國)이나 다름없다는 말은 이 시에 처음 나온다. 장미가 만약 말을 할 줄 았았다면, 필시 서시(西施)나 양귀비(楊貴 妃)처럼 나라 하나쯤은 거뜬히 말아먹었을 것이라는 시인의 말은 유머를 곁들인 최고의 찬사이다. 이 유머 하나가 이 시를 감칠맛 나게 하고, 나아가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제 해어화(解語花)의 화(花)에서 장미는 열외다. 왜냐하면 해어장미(解語薔薇)는 기생(妓生)과는 차원이 다른 귀비(貴 妃), 그 중에서도 양귀비(楊貴 妃)이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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