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미학
느림의 미학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2.06.18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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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느림이라는 말의 어감은 다분히 부정적이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매사에 빨리빨리를 외쳐대면서 느린 것은 그 꼴을 못 본다. 통신이며 교통이며 초스피드 시대인 요즘, 느림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세상 이치는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슬로우 푸드니 슬로우 시티니 하는 말들이 있는 것을 보면, 느림은 초스피드 시대에 케케묵은 골동품으로 골방에 처박혀 있는 신세로 전락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초스피드 시대에 그 진가를 유감없이 발하는 밤하늘의 별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여기 1300년 전 사람인 멍하오란(孟浩然)의 시 '벗의 시골집을 지나다(過故人莊)'에서 느림의 미학을 발견하는 것은 특별한 즐거움이다.



故人具黍(고인구계서), :  벗은 닭고기며 기장밥을 차려 놓고는

邀我至田家(요아지전가). : 먼 데서 나를 마중하여 시골집으로 데려 가네

綠樹村邊合(녹수촌변합), : 초록 나무들은 마을 한켠에 모여 섰고

靑山郭外斜(청산곽외사). : 푸른 산은 동네 밖으로 비껴나네

開軒面場圃(개헌면장포), :  문 열고 집 나서 채마밭 마주하며

把酒話桑麻(파주화상마). : 술잔 잡고 뽕나무 삼나무 농사 얘기 나누네

待到重陽日(대도중양일), : 중양절까지 기다렸다가

還來就菊花(환내취국화). : 도로 와서 국화 밭에 가보세나



시골집에서 손수 기른 닭을 잡고, 밭에서 막 베어낸 기장으로 밥을 지어 놓고, 동구 밖으로 벗을 마중하러 가는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넉넉하지 않은가? 풍족할 리 없는 시골 살림에 자기가 할 수 있는 성의를 다 갖추고는 멀리 사는 벗을 초대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조급함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이 장면에서 사람을 감동시키는 기재는 바로 느림이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닭고기가 귀한 것은 병아리 적부터 적어도 1년여를 기른 닭이기 때문이다. 기장밥은 어떠한가? 오랜만에 찾아온 벗에게 내놓기에는 초라한 음식이다. 이러한 기장밥에 가치를 불어 넣은 것은 수개월간 들인 농부의 정성이다. 돈으로 사는 것의 속성이 빠름이라면, 적어도 수개월 닭을 기르고 기장을 농사지은 것은 그 속성이 느림이다. 바로 이러한 느림이 벗에게 차려놓은 상을 장식하고 있기 때문에 그 상은 진수성찬의 상보다 고귀하다. 친구가 길러서 잡은 닭과, 농사지어 지은 기장밥을 대한 사람은 닭과 기장밥에서 단백질과 탄수화물을 따지는 대신 그 친구와 자신의 스토리를 연상함으로써 음식을 맛 이상의 감동으로 먹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느림은 스토리를 만들기 때문에 스토리가 없는 빠름을 이긴다.

시인은 이것으로 성이 차지 않는다. 마지막 연에서 느림의 미학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야 만다. 음식 잘 얻어먹고 농사 얘기 나누다가 돌아가면서 다음을 기약하는데, 그 모습이 남다르다.

명절 때, 제사 때, 생일 때 오겠다고 말하는 게 일반적인데 시인은 그렇게 말하는 대신 중양절 기다렸다가 국화 보러 오겠다고 말한다. 첫눈 올 때 만나자는 식의 낭만 정도로 생각하면 너무 가볍다. 때가 되면 저절로 피는 국화는 인간의 서두름을 허용하지 않는다. 또한 시 속의 국화는 들판의 여느 국화가 아니라 이 순간 두 벗 간의 스토리를 잉태하게 된 특별한 존재가 된 것이다. 자연이 알려주는 때를 좇아 사는 것이 느림의 요체요, 거기에 스토리를 입혀 사람 냄새 나게 하는 것이 느림의 완성이라는 것을 시인은 설파한다.

고인(故人)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스토리를 공유한 사람이다. 느리게 살아서 스토리가 생기고 그 스토리를 공유한 고인(故人)이 있다면, 진짜 고인(故人)이 되어도 후회는 없을 터이다. 느리게 살다 보면 자신의 수명을 늘이게 되는 것은 덤 치고는 대박 덤이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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